반상의 유리천장 깬 최정 9단 "BTS 제일 좋아해, 꼭 만나고 싶다"

손민호, 김은지 2022. 11. 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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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역할에 구분이 없어지는 세상이다. 능력을 평가할 때 더이상 성(性)을 문제 삼지 않는 시대다. 하나 스포츠에서만은 구별이 분명하다. 신체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승부를 내는 시합이어서다. 남자와 여자가 팀을 이루는 경기는 수없이 많지만, 남자와 여자가 대결을 벌이는 경기는 거의 없다.

바둑이 대표적인 예외다. 오로지 머리를 쓰는 경기여서 신체 차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자만 참가하는 대회는 있어도, 여자라고 참가할 수 없는 대회는 없다. 그런데 바둑에서 여자는 좀처럼 남자를 이기지 못했다. 1988년 세계 최초의 메이저 세계 바둑대회인 후지쓰배가 개막한 뒤 34년간 여자기사는 세계 대회 결승에도 올라가 본 적이 없다.

2022 삼성화재배에서 준우승한 최정 9단. 세계 대회 결승에 오른 최초의 여자기사다. 9일 한국기원에서 최정 9단을 촬영한 뒤 8일 있었던 신진서 9단과의 결승 2국 대국 화면을 합성했다. 신진서 9단의 백이 최정 9단의 흑을 역공해 판세를 뒤집은 직후의 장면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 금기가 깨졌다. 지난 8일 폐막한 2022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에서다. 한국 여자기사 1위 최정(26) 9단이 한·중·일의 최고수를 잇달아 격파하며 전 세계 여자기사 최초로 메이저 세계 대회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선 당대 최강자 신진서 9단에 막혀 세계 최초의 여성 챔피언 등극에는 실패했지만, 최정 9단이 일으킨 반상의 여풍은 바둑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신선하고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바둑계의 케케묵은 통념을 깬 최정 9단을 9일 서울 한국기원에서 만났다.


프로기사 최정


8일 삼성화재배 결승 2국이 끝난 뒤 신진서 9단 자리로 이동해 복기 중인 최정 9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Q : 삼성화재배 결승 진출을 축하한다. 소감을 말하면.
A : 세계 대회 우승을 꿈꿔왔는데, 이왕이면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어렸을 적 TV로 관전했을 때부터 막연히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하고 싶었다. 하지만 삼성화재배는 성적이 안 좋았다. 올해 3년 만에 본선 32강에 진출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예선에서 떨어졌었다. 그래서 더 기쁘다.

Q : 올해 삼성화재배는 8강에 한국 선수 7명이 진출했다. 4강은 아예 독식했다. 국가대표 박정상 코치가 최정 9단이 국가대표 훈련에 열심히 참여했다고 하던데, 도움이 많이 됐나.
A : 거의 매일 한국기원에 나와 동료들과 훈련했다. 8강에 중국 선수가 딱 한 명 올랐는데, 내가 바로 그 선수랑 대결했다. 그것도 한 번도 대결한 적 없는 양딩신 9단. 코치진은 물론이고 양딩신 9단과 대국했던 선수들이 양딩신 9단의 장단점을 알려줬다. 세게 나가면 움츠린다고 해서 계속 세게 부딪혔다. 그게 통한 것 같다.

Q : 32강에서 4강까지 상대 대마를 잡고 이겼다. 결승 2국에서도 신진서 9단의 하변 돌을 잡았다. 최정 9단다운 싸움 바둑이어서 바둑 팬은 열광했지만, 바둑은 결국 집이 많은 사람이 이긴다. 인공지능도 전투보다는 실리를 강조하지 않나.
A : 무조건 인공지능을 따라가는 건 내 장점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을 활용하되 내가 제일 잘 두는 전투 바둑을 두려고 했다. 인공지능도 열심히 공부한다. 인공지능 덕분에 포석이 좋아졌다. 포석에 약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보완됐다고 생각한다.

지난 4일 최정 9단과 변상일 9단과의 4강전 대국. 흑을 잡은 최정 9단이 93번째 수로 우변 백 진영에 침투했다. 최정 9단은 이 수로 우변 흑 대마를 선수로 살렸고 백 72수 바로 위에 붙이는 강수를 바로 터뜨려 우중앙 백 대마 사냥에 나섰다. 사실상 이 두 수로 세계 대회 결승에 진출한 최초의 여자기사가 탄생했다. 올해 삼성화재배 최고의 수다. 그래픽 한국기원

Q : 변상일 9단과의 4강전에서 대회 최고 묘수가 등장했다. 흑 93으로 우변 백에 치중한 수. 이 한 수로 최정 9단의 우변 흑이 선수로 살아 변상일 9단의 우중앙 대마를 공격할 수 있었다. 공격하는 척하면서 실리를 챙길 수도 있었는데, 떨리지 않았나.
A : 충분히 떨리는 상황이었다. 이전에는 느슨하게 두다가 많이 졌었다. 너무 후회돼 이제는 절대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다. 상대가 누구여도, 바둑이 유리해도 치열하게 두자고 다짐했었다. 다짐대로 뒀고 좋은 결과가 나왔다. 비록 신진서 9단에겐 안 통했지만. 신진서 9단은 정말 강하다. 내가 아주 많이 정진해야 한다.

Q : 4강전에서 변상일 9단이 대국 중에 울었던 사건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옆에 있었는데, 우는 소리가 들렸나.
A : 우는 소리도 들었고 자기 뺨 때리는 소리도 들었다. 경기에 집중하고 있어서 크게 영향받지는 않았다. 그 괴로운 마음을 너무 잘 안다. 동료로서도 충분히 이해한다. 변상일 9단이 바로 메시지를 보내 사과했다. 본인도 깊이 후회하고 있으니 바둑 팬 여러분이 격려해주시면 좋겠다.


청년 최정


바둑 여제 최정 9단은 26세 청년이다. 바둑 내용은 차라리 살벌하지만, 실제 성격은 쾌활하고 명랑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Q : 어렸을 때 바둑을 시작했다.
A : 일곱 살 때 처음 뒀다. 바둑 좋아하는 아빠가 가르쳐줬다. 처음엔 재미가 없었는데, 6개월만 배워보라고 해서 바둑학원에 다녔다. 그때부터 난전을 즐겼다. 아빠는 6개월 만에 이겼다.

Q : 유창혁 9단이 스승이다.
A : 어렸을 땐 광주에 살았다. 광주에서 바둑학원에 다녔는데, 본격적으로 바둑 공부를 하려면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누구한테 배워야 하나 알아보다가 유창혁 사범님께 배우고 싶다고 결심했다. 전투 바둑 하면 유창혁 사범님이니까. 지금 경기도 분당에 사는 것도 유창혁 사범님 바둑 학원이 분당에 있어서다. 열 살 때 올라왔다.

Q : 2010년 13세 7개월에 프로기사가 됐고, 그 뒤로 인생이 정해졌다. 후회하진 않나.
A : 중학교 2학년 때 입단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중퇴했다. 대회 나가느라 수업일 수를 못 맞춰 그만두게 됐다. 그때는 학교라는 공간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바둑을 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나와 있는 게 조금 괴로웠었다. 아쉬움은 없다.

최정 9단의 초등학교 2학년 때 모습. 전국소년체전에 출전했을 때다. 사진 한국기원
스케이트 강습을 마친 뒤 포즈를 취한 소녀 최정. 초등학교 2학년 때 모습이다. 사진 한국기원

Q : 온종일 바둑만 둔다고 들었다. 그래도 놀 때는 뭐 하고 노나.
A : 운동을 좋아한다. 공 가지고 노는 건 다 좋아한다. 농구를 제일 좋아한다. 농구 동호회 활동도 했다. 체력 유지하려고 동네 체육관에 가서 PT도 한다. 족구는, 음…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Q : 가무에 소질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A : 노래방에 잘 간다. 2, 3년 전에는 3개월 정도 매일 노래방에 간 적도 있다. 방탄소년단을 제일 좋아한다. 거의 모든 앨범을 갖고 있고 거의 모든 노래를 부를 줄 안다. 안무도 많이 안다. 방탄소년단을 꼭 만나고 싶다.


여자기사 최정


최정 9단은 대국 중에 머리를 다시 묶기도 한다. 9일 한국기원에서 그 모습을 다시 보여달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Q : 신진서 9단과 결승 2국 때 살짝 미소를 짓는 장면이 중계 화면에 잡혔었다.
A : 행복했다. 그 순간,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진짜 꿈꿨던 무대인데 세계 최강의 선수들이랑 이렇게 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세계 대회 결승에서 바둑 두는 모습을 정말 많이 상상했었는데, 이렇게 둘 수 있어 기쁘고 영광이었다.

Q : 세계 대회 결승전 중에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A : 그렇다. 1국 때는 사실 나도 굳어 있었다. 2국에선 오늘 이기든 지든 후회 없이 하자.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잘 해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뒀다. 진짜로 재미있었다.

8일 결승 2국이 끝난 뒤 신진서 9단과 복기 중인 최정 9단. 바둑에 집중할 때 종종 머리카락을 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Q : 최정 9단의 삼성화재배 결승 진출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바둑을 못 둔다는 통념을 깼기 때문이다. 동의하는가.
A :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 남자보다 왜 바둑을 못 둘까 하는 질문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 이유를 계속 찾았는데 찾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이유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계속 찾을수록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편견을 갖게 되고, 내가 원하는 곳에 닿을 가능성이 점점 낮아진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찾기보다 내가 원하는 목표에 집중하려고 한다.

Q : 원하는 목표?
A : 세계 대회 우승이다. 목표를 달성하고 나서 그 이유에 대해 말하겠다.

Q : 이제 후배 여자기사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후배 여자기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 바둑이든 뭐든, 영혼이 시키는 일이면 누가 뭐라고 하든지 그냥 했으면 좋겠다. 여자기사라고 다를 것 없다. 똑같은 사람이다. 그냥 자신을 믿으면 좋겠다.


에필로그


8일 삼성화재배 준우승이 확정된 뒤 최정 9단. 소감을 말할 때 여러 번 울먹이는 모습을 보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정은 한국 여자 바둑의 거의 모든 기록을 보유한 절대 강자다. 2013년 12월부터 무려 108개월째 국내 여자기사 1위를 지키고 있다. 2018년 1월 입신(入神)이라는 9단에 등극했는데, 국내 여자기사 최연소 기록(21세 3개월)이자 최단 기간 기록(7년 8개월)이었다. 지난해 여자 바둑리그에서는 18전 18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천하의 최정도 남자 기사들에겐 밀렸었다. 여자 1위 최정의 국내 통합 순위는 27위다(11월 기준). 올 삼성화재배 이전에는 세계 대회 16강 진출이 최고 기록이었다. 그런데도 최정은 국내 최고 인기 기사다. 바둑 전문 채널 두 개가 허구한 날 최정 대국을 틀어댄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최정 바둑의 시청률이 제일 높다.

이유는 뭘까. 최정이 여전히 사람의 얼굴을 한 바둑을 두기 때문이 아닐까. 인공지능의 계산이 바둑판을 점령한 지금도, 최정은 ‘기자(棋者)는 절야(絶也)’라는 통쾌한 격언을 실천하는 몇 안 되는 프로기사다. 무엇보다 그는 보이지는 않지만 강고한 어떤 벽을 깨는 중이다. 삼성화재배 4강이 끝난 뒤, 다시 말해 세계 대회 결승에 진출한 세계 최초의 여성으로 거듭난 뒤 최정은 울먹이며 다음의 소감을 밝혔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내 한계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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