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에 배 탔다가 인생 뒤바뀐 부잣집 아들 [납북귀환어부 이야기]

변상철 2022. 11. 10.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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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귀환어부 이야기] 승운호 맹00씨

[변상철 기자]

맹00씨는 다른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과는 달리 꽤나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그가 살던 고향 마을에서는 성인이 되었을 때 배를 타야 할 사람과 공부를 계속해 대학에 진학하게 될 부류들이 이미 어려서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맹씨의 부친은 고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경찰 출신의 지역 유지였다. 맹씨 역시 학교에서 꽤나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할 것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강남에서 제법 큰 사업체를 하고 있는 맹씨는 납북귀환어부 사건으로 인생의 모든 것이 틀어져버렸다고 했다. 학업을 포기해야 했으며 자신이 예정한 진로도 모두 바뀌었다고 한다. 납북된 뒤 지속된 조사와 감시로 인해 일상생활을 할 수 없어 본명을 버리고 가명을 쓰기도 했다는 그는 얼마지 않아 납북귀환어부 출신은 가명을 쓰더라도 권력의 감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감시를 피해 고향 땅을 떠나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온 그는 앵글 조립 사업, 건축 디자인 사업을 익히며 꽤 큰 규모의 공사를 수주해 성공하는 듯 했으나,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수사관들이 찾아왔고 그가 사업에 사용한 자금을 의심했다. 그의 주변에서 함께 일하는 업체들 역시 감시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사업하는 것을  꺼리게 되고, 결국 사업을 접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건설회사를 어렵게 유지해 오던 맹씨는 IMF 당시 회사가 부도를 맞았고 그는 건축사업 쪽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괴롭히던 연좌제, 감시의 고통으로 인해 그는 안양천에 몇 번이나 뛰어들었다고 한다. 수사관들에게 이유도 없이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뒤 마포대교 밑에서 빈속에 소주를 들이 붓고 얼어죽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살기 위해 바닥을 딛고 발버둥치는 맹씨에게 군사정권은 모질게 그 바닥을 헤집어놓으며 사회에서 자립하지 못하도록 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내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맹씨가 선택한 것은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살아온 시간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자신을 잊지 않을 것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 소중했던 일기장을 잃어버렸던 날 세상이 무너지는 듯 했다고 한다.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살아가는 맹씨지만, 여전히 그는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겁나고 무섭다고 했다. 아내도, 자식도 알지 못하는 과거 때문에 그는 인터뷰 내내 조심스럽게 답변했다. 이름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50년도 넘은 기억을 또렷하게 기억해 낼 수는 없지만 그때의 감정, 특히 공포와 두려움, 억울함과 분노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는 그였다.
 
 맹씨가 운영하는 이벤트 업체. 누군가의 아름다운 행복의 기억을 만드는 일을 하는 맹씨는 정작 자신은 어두운 과거를 안고 살아야 하는 모순적인 삶을 살고 있다.
ⓒ 변상철
 
정말 무서웠다

맹씨가 승운호 배를 타게 된 것은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여름방학 때 승운호라는 배에 선원 자리가 비어 있다며 함께 배를 타자는 친구의 말에 호기심이 발동해 얼떨결에 승선하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승선했기에 울릉도 방향으로 나가는 동안 뱃멀미를 심하게 했다고 한다. 멀미로 정신이 하나도 없던 그는 선실에 누워 비몽사몽 상태였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납북되었는지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맹씨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승운호가 납치되어 북한에 끌려온 뒤였다.

북에 13개월 억류되어 있던 곳은 호수가 휴양소로 온돌방의 오막살이 펜션 같은 곳이었다. 맹씨는 한국에서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았기에 북한 휴양소에서 밤마다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혹시나 끌려나가 총살당하지 않을까', 집합하라고 하면 '혹시 아오지 탄광 같은 곳으로 데려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자주 했다고 했다.
 
하도 안 보내주니까 한번은 울며불며 언제 남한으로 보내줄 거냐고 항의한 적이 있어요. 그래도 별다른 대답이 없어서 탈출을 시도하기로 했죠. 특히 나이 어린 선원들이 탈출을 시도했어요. 한번은 겨울에 탈출한 적이 있는데 북한군들이 스케이트 같은 것을 타고 쫓아와 금방 붙잡더라고요. 친구 (김)성대도 몰래 식량을 모아 탈출했지만 끝내는 도로 잡혀 들어와 엄청 맞았어요. 아마도 우리가 탈출 시도할 때마다 선장이 엄청 고생했을 거예요.

그러던 어느날 승운호 선원 모두를 태우고 어디론가 이동했는데 그곳은 원산이었다. 원산은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선원들을 돌려보내준다고 했다. 맹 씨는 마지막까지도 북한 사람들을 믿지 못해 군사분계선에 도착할 때까지 '혹시 총으로 쏘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기 때문에 군사분계선에 도착할 때까지 배 뒤쪽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군사분계선에 도착하자 한국의 해군 함정 등이 승운호를 예인하여 속초항으로 입항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맹씨는 '이제 집에 가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 멋지게 살아봐야지'하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속초항에 도착하니 가족조차 만나지 못하게 한 채 속초시청으로 연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청 건너편에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여인숙은) 두 세 명 정도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의 여인숙 방이었어요. 말이 '조사'지 몽둥이로 패고, 각목을 무릎 사이에 끼워 허벅지를 밟아 뭉개며 북한에서 받은 지령을 내놓으라는 억지 수사였어요. 이방 저방에서 하도 비명을 질러대서 귀가 아플 정도였어요. 정말 공포와 두려움이 극도에 달해 미쳐버릴 지경이었어요.

아버지가 경찰 출신이라 고문을 덜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어요. 아버지가 경찰이기 때문에 북에서 특별한 지령을 받았을 것 아니냐며 빨리 실토하라고 닦달을 하는 거예요. '00아!'하고 내 이름을 부르며 수사관이 방으로 들어오는데 그 수사관들이 맹수같이 돌변할 걸 알기 때문에 정말 무서웠어요. 수사관이 구둣발로 어린 내 가슴을 얼마 후려쳤는지 지금도 가슴 통증이 생생해요.

여인숙을 오가는 동안 선장과 기관장을 보았다. 두 사람 모두 얼마나 구타를 당했는지 몰골이 형편없이 되었다. 특히 인품 좋기로 소문난 선장은 피멍이 잔뜩 들어 터질 듯이 부은 얼굴을 했다고 한다.

맹씨는 속초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져 꽤나 오랜 시간 조사를 받고 난 뒤 구속되었다.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고, 재판 중에 판사가 물어도 어른들 대답과 같은 대답을 해야 했다. 대한민국에 돌아가면 환영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재판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왔지만 꿈 많던 소년을 받아줄 학교는 어디에도 없었다. 무엇보다 친구들은 요시찰 대상이 된 자신 곁을 하나 둘 떠났다고 한다. 결국 그는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서울 종로학원에 다니며 고시를 준비했다.

생계를 위해 일거리를 찾았지만 매번 신원 조회에서 문제가 되어 일자리마저 구하기 힘들었다. 결국 친구 이름으로 서류를 꾸며 가까스로 취직이 되었지만, 얼마 못가 정보과 형사들이 찾아왔다. 직장(평안섬유, 지금의 PAT)뿐만 아니라 학원과 하숙집까지 들이닥치니 국가보안법, 반공법을 위반한 '빨갱이' 신세로는 직장, 학원, 하숙집에서 모두 쫓겨나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맹씨의 친구들과 지인들은 점점 그를 피했고, 결국 맹씨 주변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어쩌다 밤에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그를 감시하는 수사관이었고, 그들은 끊임없이 맹씨가 어떤 일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특별한 일은 없는지 캐물었다.
 
한번은 아는 형의 소개로 종로 관철동에 유명 배우가 운영하는 경양식 집에 취직했어요. 그곳은 유명한 배우들의 단골집이었는데 그곳에서 주방 보조 겸 홀에서 일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형사들이 찾아왔어요. 집 주소를 말죽거리로 해놨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종로까지 찾아왔더라고. 몇 달 일하지도 못했는데 사장이 그만두라고 하니 어쩌겠어요. 그런 식으로 경찰은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를 계속 쫓아다녔고, 내 일상은 계속 망가졌어요.

맹씨에게 평범한 일상이란 꿈만 같은 일이었다. 아무리 발악을 해도 공안기관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공안기관은 맹씨 스스로 삶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너무 화가 나고 답답할 때면 한겨울에 발가벗은 채로 물에 뛰어들기도 하고, 미친놈처럼 악을 쓰며 길거리를 배회하며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잠시나마 속이 후련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고 한다. 매일 고문에 시달리는 꿈을 꾸고,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면 다시 마음속 깊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난폭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하루는 강남  근처 포장마차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나오는데 누군가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찌르더라고요. 직감적으로 또 정보과 수사관인가 보다 하고 다른 사람들 눈치 채지 못하게 뒷걸음질 쳐 무리에서 떨어졌어요. 그러자 수사관이 '잠시만 따라오라'하더니 안대를 씌워 봉고차에 태우더라고요.

도착하니 어떤 건물 지하실로 데려갔는데 조사실에 들어가니 두세 평 정도의 작은 방 안에 책상 하나, 의자 두 개가 있었어요. 창문 없는 어두운 방이었어요. 들어가자마자 수사관들이 곡괭이 자루로 때리면서 친구 이00(장교 출신)의 이름을 대면서 군사정보를 빼내려 한 것 아니냐며 추궁을 하더라고요. 아니라고 해도 믿기는커녕 빨리 불라며 무지막지하게 패기만 하더라고요.

새벽녘까지 구타를 당하다가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다. 수사관의 안내로 안대를 풀고 봉고차에서 내리고 보니 서울 후암동 언덕길이었다. 분하고 창피했다. 자존심도 구겨졌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그저 가슴만 부여잡고 울 수밖에 없었다. 수치감과 모욕감에 그저 죽고만 싶었지만 차마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억울하다

얼마 전 함께 승운호를 타고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친구로부터 진실을 밝히고 억울함을 풀어보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 맹씨는 눈물부터 흘렸다고 한다. 50년이 지난 지금 억울한 자신의 인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과 그동안의 힘들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친구의 전화를 받는 순간,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던 '납북귀환어부'라는 딱지가 여전히 맹씨에게 붙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맹씨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생각에, 여전히 두렵고 떨리지만 조금씩 세상을 향해 '내가 피해자다', '나는 억울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언젠가 자신의 무죄가 증명되고 억울했던 과거의 허물이 모두 벗겨지는 날 가족을 비롯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오롯이 외치고 싶다는 맹씨의 바람이 꼭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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