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르포]말레이시아 총선, 개혁이냐 안정이냐
[아시아경제 ] "의회를 해산하겠습니다."
지난 10월10일 이스마일 사브리 야콥(62) 말레이시아 총리가 코로나19 이후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정치 재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엔데믹(감염병 주기적 유행)과 함께 본격적으로 선거 유세를 포함한 정치활동을 본격화하자는 얘기다. 오는 17일 222석의 주인을 뽑는 제15대 총선 결과는 앞으로 아시아 정치의 미래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말레이시아 국회의원의 경우 임기는 최대 5년인데, 만 3년 이후부터 총리가 의회 해산권을 가질 뿐이다. 여당에 최대한 유리한 시점을 골라 총선을 치를 권한을 준 것이기에, 오히려 국회의원 임기가 유동적(3~5년)이라고 표현하는 게 합당하다. 그렇다면 왜 말레이시아는 이 시점에 총선을 치르게 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61년 이은 말레이독재= 말레이시아는 아시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민족 다종교 민주공화국’이다. 말레이계(69%), 중국계(23%), 인도계(7%)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때론 화합하는 모양새를 반복해 왔다. 다민족 사회는 서로 다른 인종 간엔 결혼도 하지 않고 언어환경도 크게 다르다. 이렇게 3개 인종으로 나뉘다 보니 정치 뉴스 이해도 무척 까다롭다. 진보·중도·보수를 대표하는 정당이 인종별로 각 3개씩 9개, 그것들의 연합세력 명칭이 3개, 그러니까 최소한 12개의 세력 이름이 혼용되는 것이다. 여기에 소수정당까지 합세하면 외국인은 복잡한 정당명 속에 길을 잃기 쉽다.
말레이시아 현대사는 화합보다는 갈등과 긴장의 세월이 훨씬 길다. 1000년 넘게 이 땅에서 살아온 말레이계 입장에선 1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유입이 시작된 중국 화교들은 낯설고 불편한 이방인이었다. 반면 중국 화교들에게 말레이족은 국가권력을 독점한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토착세력이었다.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이 같은 인종 갈등이 본격화하자, 1965년 화교 비중이 높은 싱가포르를 독립시키고 본격적인 말레이독재가 시작됐다. 그 결과 1957년 이후 2018년까지 61년간 단 한 번도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 오랜 수권 정당이 암노(UMNO)이고 이를 중심으로 한 정치연합을 ‘바리산 내쇼날(Barisan Nasional·BN)’이라고 부른다.
◇여전한 안와르 거부 정서= 2018년 드디어 정권이 교체됐다. 당초 오랜 야당 지도자인 안와르 이브라힘(75)이 이끄는 파가탄 하라판(Pakatan Harapan·PH)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것. 안와르와 PH의 힘만으로 이룬 것은 아니었다. 1980~1990년대 장수 총리로 유명한 마하티르 모하메드(97)를 당의 간판으로 모셔오고, 부패로 몸살을 앓던 암노당의 중도 세력을 끌고 와 ‘113석 대 79석으로 판도를 뒤집은 것.
정권교체 이후에 말레이시아 정치가 대격변을 맞이한 이유는 다름 아닌 안와르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뿌리 깊은 반대가 자리한다. 안와르는 말레이시아의 개혁 세력을 대표하는 저명한 민주화 투사에 가깝다. 그의 개혁의 핵심에는 능력 있는 중국 및 인도계 인재들을 널리 등용하는 것도 포함된다. 당연히 60년 넘게 독재해온 말레이계 입장에서는 ‘안와르 총리’ 등극은 가장 껄끄러운 일이다.
그 때문에 고령의 마하티르 총리가 2020년 총리직을 민심을 반영해 안와르에게 이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도파 말레이계 정치인들이 국왕까지 끌어들이며 대거 반기를 들고 이탈한 것이다. 과거 암노당 출신의 중도파 정치세력이 버사뚜(BERSATU)이며 이들이 이끄는 정치연합이 이번 선거에서 3당이 확실시되는 쁘리카탄 내쇼날(Perikatan Nasional·PN)이다. 개혁은 원하지만 화교 세력과 가까운 안와르와 연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2020년 총리를 지낸 무히딘 야신(75)이 이끌고 있다.
이렇게 크게 3대 세력이 이번 총선의 주인공이다. 판세를 읽기 극히 어렵지만 어느정도 흐름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10월 말 메르데카 센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1등은 안와르의 PH(26%), 2위가 전통의 BN(24%), 3위는 중도파 PN(13%)이 차지했다. 여전히 3분의 1이 넘는 유권자가 "결정 못했다"고 답했지만 큰 흐름은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세계 최고령 총리 기록을 세운 마하티르가 아끄는 신생정당(GTA)은 2~3%의 지지율에 그쳤지만 2~3석을 얻을 경우엔 극적으로 캐스팅보트도 노려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 유권자들은 이번 총선의 의미가 안와르 세력이 과반을 확보해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것인지 여부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 2018년 총선에서는 마하티르 및 암노 이탈세력과 연대해 승리했지만 이번에는 단독으로 승리해야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완성된다는 얘기다. 수도 쿠알라룸푸르를 비롯해 20~40대 젊은이들은 인종과 소득에 관계없이 안와르에 대한 지지가 뚜렷하다.
그러나 현재 구도로서는 정권교체의 재현이 쉽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여론조사에서 보듯 오랜 집권 경험의 BN와 한때 이들과 한몸이던 PN이 다시금 손잡고 과반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는 것.
◇부패한 전 총리 "12년 감옥형"= 암노를 비롯한 보수세력이 승리를 자신하는 배경에는 나집 라작 전 총리(2009~2018 집권)에 대한 화끈한 단죄가 자리하고 있다. 2018년 총선에서 여당이 분열하고 야당이 승리한 원인이 바로 전임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 세력의 부정과 부패였다. 국부 펀드를 악용한 천문학적인 돈세탁과 횡령이 드러나자 오랜 지지 세력이 등을 돌렸다. 이에 따라 정권까지 교체되자 사법부가 적극적으로 나집 총리를 기소하고 2022년 여름 1심 재판에서 12년 형을 확정하기에 이른다. 마치 2017년 한국에서 벌어진 촛불시위와 탄핵 심판이 연상된다. 전직 총리에 대해 엄중한 죄를 묻는 행위는 아세안 정치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던 민주주의 발전의 뚜렷한 상징이기도 하다.
지난 정치 격변 속에 암노는 2021년 이스마일 사브리 야콥 총리를 내세워 정권을 잠시 돌려받았다. 코로나19 위기에도 안정감 있는 국정 운영을 선보이고, 최근엔 여야 합의로 선거 연령을 만 21세에서 18세로 크게 낮추며 유권자 수를 100만명 이상 늘리기도 했다. 오랜 기간 정권을 독점했던 보수당이 어느정도 개혁 의지를 드러내자 국민들의 인식이 빠르게 개선됐다.
그럼에도 갈등의 핵심에는 국가발전을 위해 중국계 인재를 과감하게 전면에 기용할 수 있는지, 즉 말레이시아의 핵심 정책인 부미푸트라 정책(말레이계 우대)에 대한 완화와 유지에 모아진다. 안와르를 비롯한 야당연합은 더 빠른 개혁과 인종 화합을 원하고, 보수여당은 한 박자 천천히 가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과연 말레이시아 국민들의 선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11월19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호재 작가·고대 아세안센터 연구원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결혼해도 물장사할거야?"…카페하는 여친에 비수꽂은 남친 어머니 - 아시아경제
- "37억 신혼집 해줬는데 불륜에 공금 유용"…트리플스타 전 부인 폭로 - 아시아경제
- 방시혁·민희진, 중국 쇼핑몰서 포착…"극적으로 화해한 줄" - 아시아경제
- 연봉 6000만원·주 4일 근무…파격 조건 제시한 '이 회사' - 아시아경제
- "고3 제자와 외도안했다"는 아내…꽁초까지 주워 DNA 검사한 남편 - 아시아경제
- "너희 말대로 왔으니 돈 뽑아줘"…병원침대 누워 은행 간 노인 - 아시아경제
- "빗자루 탄 마녀 정말 하늘 난다"…역대급 핼러윈 분장에 감탄 연발 - 아시아경제
- 이혼 김민재, 재산 분할만 80억?…얼마나 벌었길래 - 아시아경제
- "전 물만 먹어도 돼요"…아픈 엄마에 몰래 급식 가져다 준 12살 아들 - 아시아경제
- 엉덩이 드러낸 채 "뽑아주세요"…이해불가 日 선거문화 - 아시아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