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없는 공연, 그곳에는 '록(Rock)'이 있었다
[이현파 기자]
▲ 지난 11월 8일 첫 내한 공연을 펼친 잭 화이트(Jack White) |
ⓒ David James Swanson |
"워 어오오 워오, 워 어오오 워오."
지난 8일 잭 화이트의 첫 내한 공연이 열린 서울 광진구 YES 24 라이브 홀,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한 목소리로 같은 멜로디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바로 잭 화이트가 밴드 화이트 스트라입스 시절 발표한 'Seven Nation Army'의 기타 리프였다. 2003년에 발표된 이 곡은 수많은 20세기의 명곡들과 함께, 이 시대 가장 위대한 기타 리프로 기록되고 있다. 수많은 스포츠 경기장과 국제 대회에서 응원가와 배경 음악으로 울려 퍼지는 등, 이 곡의 생명력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지고 있다.
잭 화이트는 코첼라, 롤라팔루자 등 전 세계의 록 페스티벌의 메인 헤드라이너를 도맡고, 12개의 그래미 상을 받 21세기 록의 영웅이다. 롤링스톤 매거진에서는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70위'에 선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 인지도는 세계적인 인지도에 비해 현저히 낮은 편이었다. 티켓 판매 역시 부진했다. 공연을 보기 전에 걱정이 앞섰다. 이 거장이 지금까지 경험한 공연 중 가장 썰렁한 공연이 되면 어떡할까 하는 우려가 생겼다.
21세기 록 아이콘이 선사한 음악 여행
그러나 첫 곡 'Taking Me Back'을 연주하면서, 위풍당당하게 호응을 유도하는 잭 화이트를 보는 순간, 모든 우려가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파란 조명 아래 파란 머리로 등장한 그는 2천석 미만 규모의 공연장을 스타디움처럼 뜨겁게 만들었다. 뒤늦게 그의 공연 소식을 들은 팬들이 달려와 공연장을 빼곡하게 채웠다. 그의 공연은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떤 록 공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밀도가 높다. 화려한 무대 장치나 특수 효과, 한국 팬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멘트 없이, 음악만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직접 마주한 잭 화이트는 경이로운 기타리스트였다. 여러 차례 기타를 바꿔 가며 공연의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전환했다. 10대 시절부터 블루스 음악에 탐닉한 그는 블루스와 하드록, 개러지록, 이키델릭, 포크 록과 컨트리를 매개하는 음악 탐험가였다. 또한 시종일관 지치지 않는 에너지와 무대매너로 관객을 압도하는 록스타이기도 했다.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연주에 몰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왜 그가 21세기의 기타 영웅으로 불리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잭 화이트는 지난 25년 동안 누구보다 성실하게 활동한 록스타일 것이다. 그는 밴드 화이트 스트라입스를 결성하고 '개러지 록 리바이벌'의 흐름을 이끌었다. 데드 웨더(Dead Weather)와 래콘터스(The Raconteurs) 등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음악적 영역을 확장했다. 2012년 솔로 뮤지션으로 전향한 이후에도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올해에는 서로 다른 성격의 정규 앨범을 두 장이나 발매했다. 그는 25년의 다단한 음악 인생을 두 시간에 알차게 눌러 담았다. 동시에 이 공연을 보는 것은, 수십 년의 미국 음악 역사를 관람하는 것이기도 했다. 잭 화이트라는 박식한 큐레이터와 함께.
공연을 보다가 잠시 귀가 먹해지기도 했다. 잭 화이트 특유의 격렬한 퍼즈 사운드로 무장한 곡들이 연이어 귀를 때렸기 때문이다. 군 복무 시절 열심히 들었던 'Lazaretto'는 추억을 자극했다. 'Steady as she goes'와 'Fell In Love With A Girl', 'Seven Nation Army' 등 떼창에 최적화된 록 앤섬(anthem)도 전율을 만들어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세션 멤버들과의 호흡도 완벽했다.
잭 화이트는 기타리스트 이상의 존재였다. 키보드를 연주하면서 'You Don't Understand Me'를 부를 때는,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자신의 죽음 이후 남겨질 사람들을 노래한 'If I Die Tomorrow'를 부를 때는, 모두가 그 사색에 공감한 듯 장내가 숙연해졌다. 그는 '기타 장인'이자, 탁월한 보컬리스트이기도 했다.
▲ 첫 내한 공연을 마친 잭 화이트와 밴드 멤버들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
ⓒ David James Swanson |
공연 내내 멘트를 최소화했던 잭 화이트는 자신이 관람한 야구 경기(한국 시리즈 5차전)를 언급했다. 그리고 관객들이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야구 경기에 몰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멘트를 듣고 나니, 이번 공연에 적용된 '촬영 금지' 조항이 이해되었다. 이번 공연은 공연 도중 모든 사진과 영상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아티스트의 의사가 완강했기 때문이다. 잭 화이트는 2018년부터 'Phone Free' 공연을 지향하고 있다. "스마트폰 없이 100% 인간적인 경험을 즐기라"는 취지였다.
물론 공연장에 있던 그 누구든 'Seven Nation Army'의 근사한 떼창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싶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잭 화이트의 선택이 못내 아쉬웠지만, 곧 '신의 한 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촬영에 연연하지 않게 되자 아티스트의 몸짓과 연주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Steady, as she goes'가 연주될 때, 잭 화이트가 'Steady as she goes'를 속삭이듯 외치면 관객들 역시 속삭이며 'Are you steady now'라고 맞받아쳤다. 마이크에서 입을 뗀 잭 화이트의 '육성'도 더 생생하게 들렸다. 그 순간에 있었던 사람만이 기억할 수 있는 감각이다.
그러니 '인스타그램에 무슨 노래를 올릴까' 생각할 필요 따위 없었다. 진짜는 이 순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복제된 영상은 오리지널의 순간을 대체할 수 없다. 다른 관객들 역시 아티스트의 의사를 존중하고 이 위대한 록스타와의 교감에만 집중했다. 스마트폰은 아티스트와 관객 사이를 방해하는 걸림돌이었음을 깨달았다. 한없이 '인간적인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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