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김득구의 비극'
[양형석 기자]
'코리안 좀비' 정찬성과 '스턴건' 김동현, '사랑이 아빠' 추성훈 등은 UFC와 ONE 챔피언십 등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활약하고 예능프로그램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국내 스포츠 팬들이라면 이제 모르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유명인사가 됐다. 이처럼 1990년대 이후 국내에서 프로복싱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고 2000년대 중반부터 격투기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격투 스포츠의 중심은 프로복싱에서 종합격투기로 옮겨졌다.
UFC가 큰 인기를 끌면서 세계적으로 종합격투기의 인기가 많이 올라갔지만 아직 세계시장에서는 종합격투기보다 전통의 격투스포츠인 복싱의 위상이 더욱 높은 게 사실이다. 2010년대 중반까지 세계시장을 주름 잡았던 플로이드 메이웨더와 매니 파퀴아오, 멕시코의 복싱영웅 카넬로 알바레즈, 헤비급 최강자 앤서니 조슈아 등은 링에 오를 때마다 수백 억에서 수천 억의 돈이 오갈 정도로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며 경기를 치른다.
▲ <챔피언>은 타이틀전 직후 의식을 잃고 사망한 비운의 복서 고 김득구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
ⓒ 코리아픽처스 |
영화적 과장도 허용되는 복싱영화의 미덕
사실 복싱은 영화로 만들기 더 없이 좋은 소재의 스포츠다. 복잡한 룰 없이 두 선수가 사각의 링에서 두 주먹을 교환하는 종목인 만큼 영화적으로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도 상당히 용이하다. 실제 경기에서도 수 차례 다운 당하며 패색이 짙어 보이던 선수가 오뚝이처럼 일어나 극적인 역전 KO승을 거두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한다. 따라서 복싱영화에서는 다소 과장이 섞인 듯한 극적인 연출도 관객들에게 허용될 때가 많다.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복싱영화는 무명이던 실베스타 스텔론을 일약 스타배우로 도약시킨 <록키> 시리즈다. 실베스타 스텔론이 주연은 물론 직접 각본까지 쓴 <록키> 1편은 197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쓸며 큰 사랑을 받았다. 물론 <록키> 시리즈는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상업성만 강조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록키>는 4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대표적인 복싱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라스트 모히칸> <히트> 등을 연출했던 마이클 만 감독이 윌 스미스와 손을 잡고 만들었던 2001년작 <알리>는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일대기를 다룬 복싱영화다. <알리>는 '역대 최고의 복서'로 꼽히는 알리의 성공신화보다 징집거부와 챔피언 박탈, 전성기가 지난 늦은 나이에 벌인 조지 포먼과의 대결 등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흥행성적은 다소 아쉬웠지만 윌 스미스는 <알리>를 통해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아카데미 작품상과 함께 힐러리 스웽크가 여우주연상, 모건 프리먼이 남우조연상을 휩쓸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복싱영화의 형식을 담은 가족영화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모건 프리먼 같은 노장배우와 힐러리 스웽크의 열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133분의 런닝타임이 아깝지 않다. 실제로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용서받지 못한 자>와 함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만든 영화 중 최고로 꼽히는 작품이다.
한국영화 중 대표적인 복싱영화는 2004년에 개봉했던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를 꼽을 수 있다. <주먹이 운다>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매맞는 일을 하는 거리의 복서 강태식(최민식 분)과 소년원 복서 유상환(류승범 분)이 신인왕전을 통해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복싱영화다. 절대 질 수 없는 두 복서의 상황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다가 두 복서가 마지막에 링에서 맞붙는, 사실 관객들에겐 대단히 잔인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 유오성은 <친구>의 대흥행 이후 영화 <챔피언>을 찍기 위해 복서와 같은 몸을 만들며 역할에 몰입했다. |
ⓒ 코리아픽처스 |
영화 <챔피언>은 1982년 레이 맨시니와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을 치른 후 의식을 잃고 쓰러져 2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고 김득구 선수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당시 김득구는 15라운드 경기로 펼쳐진 타이틀전에서 13라운드까지 잘 버티다가 14라운드에서 맨시니의 펀치를 맞고 KO로 패했고 경기가 끝난 후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곧바로 뇌사상태에 빠져 5일 후 사망했다.
김득구의 사망은 세계 복싱계에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김득구의 모친은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우울증에 빠졌다가 3개월 후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으니 결국 내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라는 유서를 남긴 채 농약을 마시고 아들 곁으로 떠났다. 당시 타이틀전의 주심이었던 리처드 그린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7개월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득구의 경기 하나가 본인을 포함해 세 사람의 아까운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이처럼 김득구는 복싱계에 큰 아픔을 남기고 떠난 비운의 복서지만 영화 <챔피언>에서 김득구(유오성 분)는 챔피언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순수한 복서로 그려진다. 낮에는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오후에는 훈련을 하면서 복서의 꿈을 키우는 김득구는 "세상에 팔 세 개 달린 사람은 없으니 복싱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공평한 운동"이라며 "누구나 두 팔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더 열심히 하면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철학으로 운동에 매진한다.
지금이야 복싱경기장에 관중이 많지 않지만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복싱은 국내에서 최고의 인기스포츠였다. 당연히 타이틀전이 열리면 경기장은 관중들로 가득 찼고 복싱 체육관에는 세계 챔피언을 꿈꾸는 지원자들이 즐비했다. 영화 <챔피언>에서도 그 시절의 복싱 체육관과 경기장의 분위기를 잘 재현했는데 특히 '복싱중계의 명콤비' 송재익 캐스터와 한보영 해설위원이 카메오로 출연하며 복싱팬들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곽경택 감독과 유오성은 <친구>에 이어 <챔피언>까지 함께 호흡을 맞추며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명콤비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챔피언> 출연장면을 둘러 싼 초상권 문제로 법적다툼을 벌이며 사이가 멀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2013년 <친구2>를 함께 찍으며 11년 만에 길었던 오해를 풀었지만 곽경택 감독과 유오성 모두 떨어져 지낸 기간 동안 전성기 시절의 결과물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정두홍(가운데)은 <챔피언>에서 김득구의 친구 이상봉을 연기하며 무술감독까지 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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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구는 챔피언의 꿈을 향해 매진하는 열혈복서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평범한 청년이기도 하다. 곽경택 감독은 신인배우 채민서가 연기한 체육관의 옆 사무실로 이사온 경미를 통해 김득구의 멜로감성을 충족시켰다. 김득구와 경미가 가까워지는 과정은 심각하고 비장한 영화 <챔피언>에서 유일하게 힘을 풀고 가볍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김득구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꼭 이기고 돌아올게"라고 했던 다짐은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무술감독인 정두홍은 2000년대 초반 영화 <반칙왕>과 <피도 눈물도 없이>,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등에 출연하며 연기활동도 활발하게 병행했다. <챔피언>에서도 무술감독을 맡은 정두홍은 체육관의 터줏대감 이상봉 역을 함께 맡으며 김득구의 체육관 적응을 다방면으로 도왔다. 나중에는 김득구가 경미와 데이트를 하러 갈 때 상봉의 유명 메이커 청자켓을 '무단으로' 빌려 입을 정도로 친해졌다.
영화 <챔피언>에는 실제 복싱 세계챔피언 출신 선수도 출연한다. 바로 배우 김병서가 연기한 전 WBA와 IBF 슈퍼미들급 세계 챔피언 박종팔이다. <챔피언>에서는 세계챔피언이 되기 전 동양 태평양 챔피언 시절의 박종팔이 등장하는데 박종팔은 실제로도 김득구와 챔피언의 꿈을 함께 꾸던 '절친'이었다. 이처럼 두 선수의 실제 친분을 알고 보면 영화 속에서 두 선수가 나누는 우정들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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