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의 시시각각]곰이를 쿨하게 처리하다
비판 여론에 현 정부로 책임 전가
가족이라더니 그 냉정함에 섬뜩
이태원 참사 직후 원고 마감이 임박한 몇몇 필진에게 연락이 왔다. 안타까운 156명의 죽음 앞에서 대상이 누구든 비판하는 글을 쓰는 게 조심스럽다고 했다. 동의했다. 같은 마음이었다. 사실 받아둔 몇몇 원고 역시 당분간 내보내지 않기로 이미 결정한 뒤였다. 정부가 강제한 국가 애도기간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을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상처받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까지는 못 하더라도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는 날카로운 언어를 더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혹여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은 불쾌함을 주지나 않을까,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그게 인지상정일 거다.
그런데 문재인 전 대통령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국민이 비통하든 말든 보듬기보다 내치기를 택했으니 하는 말이다. 그것도 이태원 참사의 충격이 가시기는커녕 국가 애도기간 중이었던 지난 5일 뭐가 그리 급한지 몇 년 동안 스스로를 아빠로 칭하며 청와대에서 자식처럼 키운다고 선전하던 풍산개 두 마리 곰이와 송강이를 국가에 '반환'하겠다고 나섰다.
언론 보도로 이같은 사실이 알려져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문 전 대통령 측 인사들이 이런저런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문 전 대통령 내외는) 관저 개 사룟값까지 (자비로) 직접 부담한다"고 주장해온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풍산개들은 (문 대통령이) '위탁'받아 관리하던 '국가소유'"라며 "새 대통령이 부탁하고 합법적 근거를 관련 부처가 만들겠다니 위탁을 승낙한 것인데 윤 대통령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에 변명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윤건영 의원(구로 을)과 국민소통수석을 지낸 윤영찬 의원(성남 중원구) 역시 "윤석열 정부가 일하지 않아 생긴 법의 구멍"이라는 식으로 대통령실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세 사람 모두 풍산개는 지난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선물한 국가기록물인 만큼 법대로 대통령기록관에 이관하겠다는 주장을 하는 셈인데, 쉬운 말로 풀자면 결국 매월 250만원의 ‘개 관리비’를 정부 예산으로 해주지 않으니 더는 돌보지 않겠다는 얘기다.
문 전 대통령의 공식 페이스북은 더 노골적이다. "오랫동안 풍산개들을 양육했고 곰이가 근래 입원 수술하는 어려움도 겪었기 때문에 돌려보내는 것이 섭섭하다"는 전제를 달면서도 "쿨하게 처리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쿨하게 처리하면 그만이라니. 세간엔 월 1400만원에 달하는 대통령 연금을 받는 문 전 대통령이 고작 250만원에 반려견을 버렸다며 그 인색함에 주목하지만, 난 이 냉정함에 더 소름 끼쳤다. 인연 없는 미물이라도 아프면 눈에 밟히기 마련인데 3년 넘게 자식처럼 돌봤다는 반려견이 치료를 받는 와중에 쿨하게 '반환'해버리는 모습이 무슨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말이다.
탄핵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쫓기듯 나가면서 키우던 진돗개를 두고 가자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자들은 "반려견을 유기했다"며 박 전 대통령을 비난하기 바빴다. 문 전 대통령 본인도 방송에 출연해 "버려진 진돗개들이 안타깝다, 대선 출마만 안 했다면 직접 키우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집권 초기엔 유기견 토리를 입양해 좋은 사람 이미지 메이킹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런데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2017년 박 전 대통령을 겨냥했던 트위터 표현대로 "사진만 찍었지, 실제 애견인은 아니었나" 보다. 임기 동안 가족이라며, 예약 판매 중인 2023년 치를 비롯해 이미 여러 해 '문재인 달력'에 곰이와 송강이를 등장시켜 적잖은 인세를 챙겨놓고는 이렇게 한순간에 아무 데나 옮겨도 되는 물건 취급을 하니 말이다. 문 전 대통령은 9일 오후 늦게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올려 이런저런 변명을 했지만 측근의 논리를 동어반복하는 데 그쳤다.
헤어져야 할 피치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작스런 파양 탓에 곰이와 송강이가 마음 둘 데 없이 앞으로 얼마나 힘겹게 살아갈까 측은한 마음이 든다. 동물원에 갈 거란 전망이 많긴 하지만 어딜 가든 아무쪼록 정말 가족처럼 품고 사랑해주는 좋은 반려인을 만나길 바란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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