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인문학을 위한 인문학자에 의한 인문학적 설득

2022. 11. 10.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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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인문학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른바 인문학 위기는 이제 상식이 되었다. 현직 대통령이 대선주자 시절 “인문학이라는 건 공학이나 자연과학 분야를 공부하며 병행해도 되는 것”이라며 “많은 학생들이 대학 4년과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은 유명하다. 이것이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의 입장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과거에 다른 정당 출신 대통령도 “대학도 산업이다”라고 일갈해서 산업화가 어려운 인문학에 찬물을 끼얹은 적이 있다.

인문학 위기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대학 내 인문학 계열 학과가 사라지거나 통폐합되는 것? 인문학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이 줄고 있는 것? 인문학 논문 질이 천차만별인 것? 사람들이 인문학의 의의에 대해서 좀처럼 공감하지 않는 것? 인문학 내용이든, 인문학 제도이든, 인문학 유통이든, 인문학자의 마음 상태든, 차세대 인문학자 육성이든, 인문학 지원 체계든 뭔가 인문학에 관련된 어떤 것이 심각한 위기에 있는 것은 틀림없다.

이것이 모든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기도 어렵다. 인문학이라는 말은 이미 대학과 학계의 영역을 훌쩍 넘어 사회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뜨개질 인문학, 걷기 인문학, 등산 인문학, 사주 명리 인문학, 침구 인문학 등 인문학의 종류는 끝이 없다. 이러한 ‘인문학’이 성행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 인문학 위기는 제도권 인문학의 위기다. 과학자들이 유사 과학을 비판하듯이, 제도권 인문학자들은 이러한 인문학들을 유사 인문학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들이 보기에, 유사 인문학의 성행은 인문학 위기의 한 측면이다.

「 인문학 즐기는 모습 보며 감탄할
맛과 문화 창출에 실패한게 위기
사회적 효용을 강조하기 이전에
인문학의 깊은 맛을 체험케 해야

김영민의 생각의공화국

인문학(자)이 망하건 말건 그게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죠? 인문학 좋아하는 사람은 인문학 공부하게 두고,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하게 두고, 각자 갈 길 가면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인문학이 멀쩡하게 존속하기에 충분한 청중과 수요는 국내 대학이나 학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국내 인문학이 해외에서 청중을 찾기도 쉽지 않다. 인문학의 언어 장벽은 타 분야보다 높으며, 인문학은 해당 지역 특유의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제도권 인문학이 학계를 넘어 일반 시민들에게서 청중을 찾기도 쉽지 않다. 일반 시민에게 전문가들의 언어는 여전히 어렵고, 인문학자 대부분은 자기 연구를 일반 시민에게 설명해 본 적이 없다. 그러면 대학 내 학자들이나 인문학 공부하게 하죠, 뭐. 먹고 살기도 힘든 시민들이 그렇게 전문화된 인문학을 애써 배워야 하나요, 티브이에서건, 유튜브에서건, 시민단체에서건, 서점에서건, 박물관에서건, 백화점에서건, 배울 수 있는 쉬운 인문학이 넘쳐나는데. 굳이 시민들이 전문적인 인문학에 부응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각자 갈 길 가죠, 뭐.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대학 안팎의 인문학은 현재 국민 세금에 의해 연명하고 있다. 그래서 제도권 인문학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빈사 상태에 있는 인문학에 국가의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물론, 경제가 성장하고 국고가 여유 있으면, 당장의 수요에 연연하지 않고 제도권 인문학을 지원하면 된다. 그러나 경제가 불황일 때는? 경제 위기가 감지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묻는다. 왜 인문학에 국민 세금이 투여되어야 하죠? 도대체 인문학이 이 사회에 무슨 유용성이 있기에?

인문학 연구자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으니 지원해야 한다는 논리는 한계가 있다. 이 사회에는 훨씬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실제로 가족 부양 부담이 없는 사람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사회 일각에는 생존과 부양의 책임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 가야 할 재원을 왜 인문학 전공자에게 주어야 하나? 끝내 인문학에 지원하라고 요청하면, 국민 세금이 왜 네 취미생활(?)에 들어가야 하냐는 냉소적인 반응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흔히 나오는 게 인문학은 기초학문이라는 주장이다. 사회적 효용을 만들어내는 응용학문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인문학 같은 기초학문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과연 이 주장을 다수가 납득할 수 있을까. 의학의 발전은 난치병 치료를 가능하게 했고, 많은 이의 고통을 경감시켰다. 인문학도 그에 상응하는 유용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의학은 육체의 고통을 경감하지만, 인문학의 정신의 고통을 경감한다고? 정신 건강 관련해서는 정신의학이라는 분야가 따로 있다. 한민족의 문화적 DNA 운운하는 “K 정신” 연구 혹은 최첨단 물리학과 동양사상의 합일 운운하는 (유사) 인문학 연구로는 멀쩡한 정신을 병들게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물론 엄격한 학문적 훈련을 받은 인문학자들은 그러한 사이비 학술 담론에 거리를 둘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진짜 인문학 전문가들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 너무 미세해 보이는 문제에 천착하기 바쁘다. 예컨대, 고대 문헌을 연구하면서 옛 문헌 간에 어떤 표현 차이가 있는지 따지고 있는 학자를 상상해보자.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따져 묻는 거다. 당신 연구가 무슨 쓸모가 있죠? 왜 내가 낸 세금을 당신 연구에 퍼부어야 하죠? 극히 전문적인 연구에 몰두 중인 그 학자는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라고 대답하고, 다시 책상 앞 문서 더미 앞으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고대 문헌 판본 연구가 21세기 한국 시민에게 어떤 유용성이 있을까? 경제가 불황일 때 이런 질문에 요령 있게 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인문학에 사회적 유용성이 아예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를테면, 인문학은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맥락맹, 침소봉대, 말꼬리 잡기, 의도적 곡해, 무의식적 곡해, 착시, 선동, 환청, 비문이 만연해 있다. 정부 공식 발표건, 시민사회 성명이건, 대학 총장 연설이건, 가릴 곳 없이 불량 커뮤니케이션으로 인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 인문학이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맥락을 구성하고, 풍부하게 해석하는 일을 주 업무로 삼는다고 할 때, 인문학 연구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질을 올리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요컨대, 인문학을 하면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쓸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고 싶다. 따라서 정부는 인문학에 지원하라! 오, 어쩐지 설득력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이를 대놓고 주장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글쓰기를 잘할 수 있게 되니 인문학을 지원하라는 내용의 글을 쓰려면, 그 글이 멋져야 설득력이 있다. 인문학을 하면 글을 잘 쓰게 된다는 주장의 글이 지루하고 빈곤한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주장은 이미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셈이다. 자, 어느 인문학자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점에서 인문학의 필요를 정당화하기가 이렇게 어렵다. 경제가 불황인 시기에는 특히 그렇다. 그러면 어쩌라고? 차라리 인문학의 맛에 중독시키는 것은 어떨까.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그 음식의 사회적 효용성이 무어냐고 다그치면, 그냥 이렇게 말하는 거다. 이거 한번 잡숴봐. 입안에 퍼지는 황홀한 맛을 보고 나면, 그 사람은 그 음식의 사회적 효용성 따지기를 그치고, 그저 함께 앉아 먹기 시작할 것이다.

달리라는 SNS 유저의 전언에 따르면 어느 소설가는 작가의 말에서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으려다 낳게 된 경위를 적었다.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는데,남편이 이렇게 말했다는 거다. “그런데 수박 맛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남편은 이 세상에 모순이나 고통이 없다고 설득한 것도 아니고, 출산이 갖는 사회적 효용을 역설한 것도 아니다. 그저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맛, 살아서 실제 먹어보지 않고는 상상이 어려운 그 맛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뿐이다.

힘들여 인문학의 사회적 효용을 역설해야 한다면, 이미 인문학 선양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인문학이 위기라는 탄식은 인문학 종사자들이 그들 스스로 즐기고, 또 타인들이 그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감탄할 맛과 문화를 창출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은 아닐까. 그 실패한 폐허에서 이제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패배하기 쉬운 잣대를 가지고) 무기로 인문학을 수호하려 드는 것, 그것이 오늘날 인문학 위기의 한 증상은 아닐까.

오래전 졸업해서 지금은 어엿한 회사원이 된 옛 학생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대학 시절에 어렵지만 좋다는 인문학 수업들을 여기저기 애써 찾아다니며 들었는데, 그 체험을 잊을 수 없어요. 너무 흥미진진했어요. 텍스트를 꼼꼼히 읽자,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의미가 수면 위로 떠오를 때 느껴지던 그 지적 희열. 그 맛을 보았기에 졸업 후에도 책을 계속 읽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졸업한 뒤에도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었어요.”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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