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죽음들… 고통 함께 느껴, 우리는 눈송이처럼 결속하는 존재"
한강·나희덕·한기욱·한국화
"여전히 세상은 힘들고 슬픔에 잠겨있는데 이렇게 상을 받는 일 자체가 마음 무겁게 느껴집니다."
제30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나희덕 시인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시·소설·평론·번역 부문 올해 수상자를 발표하는 9일 오전 간담회 자리에서다. 그는 2021년 시집 『가능주의자』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기쁨을 최대한 삼가는 표정이었다.
"『가능주의자』를 쓰는 동안 고스란히 코로나19 기간이었다. 자욱한 혼돈의 시대를 시는 어떻게 건널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내내 던지며 시집 속의 작품들을 썼다"고 소개했다. 직접적으로 코로나19를 언급했지만, 최근 이태원 참사와 겹치며 무게감이 더했다. 이날 간담회도 당초 이달 1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지난달 29일 발생한 참사 애도를 위해 한 차례 연기됐다.
"무고한 죽음들… 우리는 고통 함께 느끼며 눈송이처럼 결속하는 존재"
소설 부문 수상자인 한강 역시 '오늘의 고통'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지난해 발표한, 제주 4·3의 아픔을 다룬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로 상을 받는다. 한강은 "무고한 죽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쓴 소설, 우리가 연결되어있다는 믿음을 붙잡고 쓴 소설이었다"며 "모든 무고한 죽음들, 요즘 접하게 되는 아주 많은 죽음들 속에서 그런 생각을 이어가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고통을 알고, 고통을 받고, 고통을 함께 느끼는 존재로서 눈송이처럼 결속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썼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의미가 있다면 그런 연결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라고 덧붙였다.
"수상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작별하지 않는다』의 사실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심의 마음이었다. 작별하지 않은 마음, 작별할 수 없는 마음, 작별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마음에 대해서 더 많이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라고도 했다.
한강은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이후 바깥 걸음을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지난해 9월 출간한 『작별하지 않는다』는 5년 만에 펴낸 소설이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고 나서 최근 1년 넘게 여러 가지 이유로 글을 쓰지 못했다"며 "(이번 수상이)이제 그만 쉬고 다시 글을 써보라는 말씀 같아서 아침마다 책상으로 가서 글 쓰는 루틴을 회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다음 소설을 위해 메모하고, 시작하는 몸과 마음을 만들려고 운동하며 시동을 걸고 있다"며 "올겨울부터 쓰면 내년 가을에는 신작이 나올 것 같다"고 했다.
대산문학상은 시·소설·희곡·평론·번역 단행본에 주어지는 상이다. 희곡과 평론은 격년으로 번갈아가며 시상하는 방침에 따라, 올해는 시·소설·평론·번역 부문에 상이 주어졌다. 시·소설은 지난해 8월부터 올해 7월까지 출간된 단행본, 평론은 지난 2년, 번역은 지난 4년간 출간된 책이 대상이다. 올해 평론 부문은 문학평론가 한기욱(인제대 교수)의 평론집 『문학의 열린 길』, 번역 부문은 소설가 황정은의 장편 『백의 그림자』를 한국화와 사미 랑제라에르가 프랑스어로 공동번역한 『Cent obtres』가 각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한기욱 평론가는 "평론은 작품을 알아보는 행위인데, 묵묵히 글 쓰는 내 스타일을 대산문학상이 알아봐 준 것 같아 감사드린다"고 했고, 해외에 있어 간담회에서 참석하지 못한 번역가 한국화는 수상소감문에서 "황정은 소설 번역은 한국어의 특징상 자주 생략된 주어, 상황에 따라서만 이해할 수 있는 모호한 표현, 쓰인 것 사이의 공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일이었다"고 소개했다. 공동번역가 사미 랑제라에르는 수상소감문에서 "황정은은 소설 속에 그린 전자상가와 상가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용히, 하지만 굳은 목소리로 역설한다. 그 감동적인 목소리가 프랑스어권 독자들에도 전달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전했다.
"시는 스러져 가는 목소리 다정하게 지키는 힘"
간담회 분위기는 조심스러웠지만, 수상자들은 희망도 이야기했다. 나희덕 시인은 수상 시집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가능주의자』에 실린 시에서 '어둠의 빛'이라는 말을 썼다. 어둠을 물리치는 외부의 거대한 빛이 있는 게 아니라, 어둠 자체에서 빛을 이끌어내야한다는 의미다. 시대의 절망과 불가능성이 나를 살게 하고 시를 쓰게 한다면, '가능주의자'라는 말로 스스로를 표방하면서라도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산문학상 시상식은 다음달 1일 오후 6시 30분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매화홀에서 열린다. 수상자에게는 각 5000만원씩의 상금이 주어진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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