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김정은?" 인도의 유별난 도시에 가다 [전명윤의 타인의 식탁]

전명윤 2022. 11. 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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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식탁] 시크교 사원의 평등을 위한 한 끼 식사

'타인의 식탁'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음식을 소재로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전명윤 기자]

 의자마다 대형 LCD 화면이 설치되어 있는 인도의 최신 열차 '가티만 익스프레스'
ⓒ 전명윤
 
2020년 2월, 인도의 델리에서 암리차르로 가는 고속열차 사땁띠 익스프레스 12031편은 너나 할 것 없이 차내 사진을 찍는 승객들로 떠들썩했다. 인도 철도청은 기존의 초고속 열차인 '사땁띠 익스프레스'와 '라즈다니 익스프레스'의 뒤를 잇는 '가티만 익스프레스'를 운행하기 시작했는데 가티만 익스프레스의 신형 객차를 사땁띠 익스프레스의 델리-암리차르 구간에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이 날이 신형 객차를 처음 운행하는 날이었다. 

기차는 항공기 같았다. 고정식 LCD가 좌석마다 설치되어 있었고 USB 충전 포트도 있는 등 기존 인도 기차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부대 설비가 다양했다. 신기한 마음에 LCD를 꾹꾹 눌러봤지만 켜지지 않았다. 차장에게 물어보니 이건 객차만 가티만에 사용하는 신형 차량일 뿐 운행은 사땁띠라 LCD를 틀 수 없다고 알려줬다. 

주변의 인도인들도 나처럼 LCD를 꾹꾹 누르고 있던 차에 외국인이 의기양양하게 물어보니 모두 나를 주목했고, 차장의 대답에 일제히 실망스러운 얼굴을 했다. 차장이 표 검사를 마치고 다음 객차로 넘어가자마자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터번을 두른 인도인이 자신은 라젠드라 싱이라며 악수를 청했다.

"유아르 컨츄리(너네 나라? 너 어디서 왔어?)"
"꼬리야."

"김죵은?"(김정은?)
"네히, 김죵은 우뻐르 코리아, 무제 안다르 코리아."(아니, 김정은은 북한, 난 남한)

"압 힌디 볼따헤(너 힌디 할 줄 알아)?"
"토라. 앙글레시 베터(조금, 영어가 나아)."

인도에서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인도의 국어인 힌디어는 어순이 한국어와 같다. 이것만으로도 꽤 유리하다. 우리처럼 인도인도 영어로 말하기 전 어순을 먼저 생각한다. 피차 머리 아픈 상황인데, 다행히 많은 인도인은 자기네 어순대로 영어 단어를 나열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한국인으로서도 무척 편하다. 알아듣기에도, 말하기에도.

이런 대화를 보면 미국 유학한 친구들은 브로큰 잉글리시라고 영어 취급을 안 하지만 어차피 그들도 인도 오면 내 통역없이는 인도인과 대화할 수 없으니 적어도 인도에서는 내가 영어 천재다. 게다가 인도에서의 대화는 힌디어에 영어 단어를 섞고, 영어 대화를 할 때는 힌디어를 섞는다. 즉 양쪽 말을 적당히 알지 못하면 대화 도중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네히, 김죵은 우뻐르 코리아, 무제 안다르 코리아"에서 네히는 힌디에서 부정형이고, 우뻐르는 위, 안다르는 아래라는 뜻이다. 즉 김정은은 북한이고, 난 남한에서 왔단 말이다. 

부자의 잔칫상을 거절하다
 
▲ 암리차르의 시크교도 암리차르는 인도에서 유일하게 시크교 신자가 힌두교 신자보다 인구 면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다.
ⓒ 전명윤
 
그는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였다. 이 기차의 종착역이자 내 목적지인 암리차르는 인도쪽 펀자브에서 가장 큰 도시인데다 시크교도의 예루살렘 같은 곳이다. 인구는 250만 명 정도인데 이중 69%가 시크교, 힌두교도는 28%다. 인도에서는 보기 드문 힌두교도가 소수인 도시다. 

라젠드라 싱은 호기심이 많은 친구였다. 한국에도 시크교가 있는지(있을 리가 없잖아) 시크교를 믿는 인도인 노동자들이 있다면 시크교 사원인 구르드와라가 있는지도 궁금해했다. 나는 2001년 경기도에 구르드와라가 생긴 것은 뉴스를 통해 알고 있으나 가본 적은 없다고 했다.

라젠드라 싱은 대화가 끊어지면 한참 밖을 바라보다가 이내 빙긋 웃고는 또 다른 걸 물어봤다. 인도인들이 원래 호기심이 많고 낯선 타인에게 말 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제는 인도도 변하는 데다 중산층 이상이 타는 이런 고급 기차는 호기심에 앞서 체면이 지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요즘은 라젠드라 싱처럼 구는 인도인이 외려 흔하지 않다. 

"왜 가? 암리차르에?" 

라젠드라 싱이 짜이(차 음료)를 내밀며 물었다.

"엑 온카르. 하나의 신이 궁금해서."

라젠드라 싱이 환히 웃었다. 엑 온카르는 시크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이다. 
 
▲ 시크교를 만든 구루 나나크 구루 나나크를 그린 벽화
ⓒ 위키피디아
 
시크교는 15세기 구루 나나크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도는 지금이나 그때나 시끄럽긴 마찬가지였는데, 당시는 서쪽에서 온 이슬람 지배자가 북인도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구루 나나크가 태어나던 1469년만 해도 이슬람의 북인도 지배가 400년 가까이 되던 시점이었다.

이슬람교는 유대교, 예수교처럼 유일신을 믿는다. 인도처럼 온갖 신이 공존공생하는 다신교 문화권에서 일신교는 낯설다.

인도인의 신관에서 알라를 믿는 건 별 일이 아니다. 4억 4천만이라는 힌두교의 신중에 하나쯤 끼워넣는다고 신들끼리 동족 상잔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이 단 하나여야 하는 종교에서 4억 4천만의 다른 신은 타도의 대상이다. 세상에는 단 하나만 있어야 하니까. 여럿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는 건 이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인도를 점령한 후 개종을 시도했다. 고릿적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것처럼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까지는 아니었고, 개종자들에게는 지즈야라 불리는 세금을 면제해줬다. 부유한 상층 카스트에게야 그깟 세금 내고 마는 수준이었지만, 가난한 하층 카스트에게 세금 면제는 매혹적인 조건이었다. 하층 카스트의 개종이 이어졌다. 힌두교를 믿는 상층 카스트들의 '우리를 배신한 천민들=무슬림'이라는 식의 인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구루 나나크는 그런 시대가 싫었다. 그가 만든 시크교는 힌두교의 프로테스탄트 쯤의 위치에 있는데 이슬람으로부터는 유일신 개념을 받아들였고, 카스트를 부정했다. 구루 나나크의 카스트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어느날 구루 나나크는 하층 카스트인 랄로라는 사람의 집에 여장을 풀었다. 참고로 그날은 그 마을의 유력자이자 상층 카스트인 바고의 집에서 생일 잔치가 열려 순례자와 상층 카스트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있었다. 구루 나나크는 그 자리에 가지 않고 랄로의 집에서 식사했다. 새로운 종교를 만든 유명인이 자신의 초대를 거절하고 하층 카스트의 집에서 식사했다는 말에 바고는 자신을 무시하는 일이라고 여겨 구루 나나크를 반 강제로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자신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바고에게 구루 나나크는 '카스트는 우리의 행위로 결정될 뿐'이라며 '없는 형편이라 누군가를 대접하면 자신이 굶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베풂을 실천하는 랄로의 식사가 부자인 바고의 잔치보다 더 가치있다'라고 역설한다. '랄로의 가난한 식단은 타인에 대한 친절함으로 가득하지만, 바고의 풍성한 상은 그가 착취한 가난한 자들의 피로 가득하다'라는 말까지 한 걸 보면 그는 당시 사회상에 대해 상당히 전투적인 입장이었던 것 같다. 

함께 밥 먹자
 
▲ 시골역의 노부부 잠시 정차한 작은 시골역. 시크교도 노부부가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 전명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기차가 잘란다르 역에 도착했다. 이제 목적지까지는 한 시간 남은 셈이다. 사땁띠 익스프레스는 인도 기준으로는 초고속에 속하지만 그래봐야 448Km를 6시간에 걸쳐 간다. 시속 74Km/h란 이야기. 한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속도지만 인도에 있다 보면 종종 이 정도 속도에 현기증과 공포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건 신형 객차에 가장 먼저 탑승하는 느낌은 좋았다. 

라젠드라 싱은 기차에서 만난 외국인인 내가 자기가 사는 도시로 오는데도 초대하지 못하는 상황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암리차르에 집이 있으면 초대하고 싶은데, 나도 호스텔에 살고 있어서..."

말끝을 흐렸다. 진즉에 그에 대해 호구 조사는 끝냈는데, 라젠드라 싱은 암리차르에 사는 대학원생이었고, 그의 집은 암리차르에서 북쪽으로 20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편찮아 델리의 한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때문에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장남이었다면 모든 일을 작파하고 병원에 기거해야 했으나 그는 집안의 막내라 병구완의 의무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마, 구르드와라에서 잘 거야. 거기 외국인도 재워주거든."

구루 나나크가 만든 종교는 언제부턴가 시크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시크는 겸손한 제자라는 뜻이다. 카스트 제도에 대한 구루 나나크의 반감은 교리에도 스며들었다. 시크교는 힌두교와 달리 인간을 평등한 존재로 본다. 

당시도 그렇지만 지금도 힌두교도들은 낮은 카스트와 같은 자리에서 식사하는 걸 꺼리는 경향이 있다. 구루 나나크는 자신의 제자에게 카스트 없는 세상을 역설했지만 구분과 구별이 익숙한 사람들은 구루 나나크가 있을 때는 함께했지만, 그가 없을 때는 그전에 하던 대로 계급별로 앉아서 밥을 먹었다.

구루 나나크는 카스트를 없애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의 성씨를 통일하기로 했다. 갑오개혁 이전에는 한반도에서도 성씨로 반상의 구분을 뒀다. 그런 점에서 인도 사회의 비인간적인 카스트 간의 차별이란 사실 백 수십 년 전에는 꽤나 일반적이었던 전 근대의 잔재일 뿐이다. 
 
▲ 박해받는 시크교 구르들 구루 나나크 사후 시크교의 지도자들은 무굴 제국으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한 시크교 구르는 산 채로 삶겨지기까지 했다.
ⓒ 전명윤
 
시크교를 믿는 모든 남성은 싱 Singh, 여성은 카우르 Kaur라는 성씨를 갖는다. 하나의 성을 쓰면 카스트가 사라질 거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16세기 관점의 참신한 시도였다. 

두번째로 구루 나나크는 모두 한데 밥을 먹는 구상을 했다. 카스트별로 밥을 따로 먹는 습관을 바꿔 카스트 제도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 때문에 시크교 커뮤니티에는 일종의 공동 부엌이 있다. 공동부엌에는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화덕인 탄두리가 있고 그 주변에 요리할 수 있는 일종의 부뚜막이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순번을 정해 식사를 준비하고, 식사가 마련되면 커뮤니티의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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