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와 루이비통 [더 하이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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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걸리지.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할 거니까.”
한 다큐 필름에서 작품 하나를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는 질문에 답한 박서보 화백의 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단색화 거장으로 불리는 박 화백은 올해 91세의 나이에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최근엔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루이비통과 함께 협업 작품을 만들어냈다.
루이비통은 1년에 한번 가방 컬렉션 ‘아티카퓌신’을 발표한다. 브랜드의 대표 가방 중 하나인 카퓌신을 세계의 현대미술작가들과 협업해 만드는 특별 한정판이다. 2019년에 시작해 매년 6명의 작가들과 협업 컬렉션을 선보여 왔다. 한 모델당 생산량은 200점. 가방은 출시와 동시에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지난 11월 7일 공개된 올해의 아티카퓌신 역시 출시되자마자 전 제품이 모두 팔렸다. 올해는 다니엘 뷔랑(Daniel Buren),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 피터 마리노(Peter Marino), 케네디 얀코(Kennedy Yanko), 아멜리 베르트랑(Amélie Bertrand) 등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인기가 높은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올해의 아티카퓌신 작가 라인업엔 지나칠 수 없는 작가의 이름이 들어있다. 한국 작가, 바로 박서보 화백이다.
루이비통이 한국 작가와 제품 협업을 진행한 것은 168년의 브랜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쇼윈도 장식이나 일부 퍼포먼스에 있어 한국 작가와 협업을 한 적은 있었지만, 글로벌로 진행하는 제품 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 주인공을 한국 지사에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선정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첫 한국 작가와의 제품을 누가 만들 것인가. 박 화백은 이 질문의 정답이 맞았다. 서울 청담동루이비통메종에서 직접 본 박 화백의 아티카퓌신은 하나의 ‘작품’이라 해도손색없을 만큼아름다웠다. 루이비통과 박 화백의 만남은 이번이 세 번째다. 올해 5월 한국에서 최초로 진행한 팝업 레스토랑 ‘피에르 상 at 루이비통’에서 박 화백의 대표작 묘법 두 점을 전시한 것이 처음이었고, 지난 10월 『루이비통 시티 가이드』의 서울 편 개정판에 게스트로 참가해 레스토랑부터 갤러리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다채로운 모습을 소개한 것이 두 번째다.
아티스트와 브랜드가 협업 제품을 내는 것이 흔해진 요즘, 아티카퓌신이 주목받는 이유는 작가와 브랜드간의 협업 과정과 그 결과물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가방은 작가의 작품과 연결하거나 새로운 컨셉으로 만들어진다. 이 모든 과정을 루이비통의 장인이 함께하며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가방에 녹여낸다. 말 그대로 장인이 한 땀 한 땀 주름을 잡고 구슬을 꿰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물론이고, 작가와 작품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가방 안감, 바닥에 붙이는 나사 하나에까지 의미를 입혀 디자인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아티카퓌신은 출시되자마자 바로 다 팔려나가는데, 올해의 아티카퓌신 역시 완판됐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루이비통은 박 화백의 작품을 포함한 작가 6인의 아티카퓌신을 선보이는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고 있다.
박서보, 루이비통이 입은 그의 색과 질감
박서보 화백의 아티카퓌신은 작가의 대표 연작 ‘묘법’ 중 2016년 작을 기반으로 디자인했다. 묘법은 1960년대 말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는 연작으로, 작품 초기엔 색을 입힌 캔버스 위 연필로 선을 그어 작업했으나 1980년대 초반부터 한지의 특성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몇 주간 물에 적셔 둔 한지를 캔버스에 붙이고 그 위에 연필과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작업을 이어 나가는 방식이다.
이번 아티카퓌신에서는 독특한 촉감 및 질감을 재창조하기 위해 송아지 가죽에 붓질 효과를 낸 후 고도의 3D 고무 사출 작업을 정교하게 적용했다. 또한 밝은 레드·버건디 색감의 가죽을 엄선해 수작업으로 고색미가 배어나는 화백의 작품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가방 안은 황색의 올 굵은 캔버스 천을 사용해 박 화백의 작품 뒷면을 그대로 재현했다. 안주머니엔 프린팅된 작가의 서명도 넣었다. 가방 바닥에는 화백이 오랜 시간 작품에 사용해온 나사에서 영감을 받아, 루이비통 모노그램 꽃장식이 새겨진 네 개의 스터드를 달았다. 박 화백은 “작품이 입혀진 아티카퓌신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 곧바로 브랜드의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며 아티카퓌신은 예술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대중들과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라고 덧붙였다.
루이비통의 아티카퓌신 프레젠테이션은 오는 11월 24일까지 별도 사전 예약 없이 현장 방문을 통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장소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루이비통 메종 서울 4층이다. 메종에선 박 화백의 묘법 원작 3점도 함께 만나볼 수 있으니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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