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의 새로운 시도" vs "과한 연출로 묻혔다"…화제의 달항아리

이은주 2022. 11. 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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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 '박영숙 백자'전 논란
백자에 LED 형광등 그림자
"현대미술 매체 가능성 탐색" vs
"달항아리 조형미 안보여" 의견
전시 디자인 갈수록 중요해져
"리움 브랜드에 맞는지 의문"도
리움이 현대미술 상설전 공간에서 선보이고 있는 '여월지항:박영숙 백자'전. 사진 리움미술관


리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박영숙의 달항아리. 사진 리움미술관

눈이 부시다. 어두운 벽을 지나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니 온통 하얗다. 천장에 휘황한 형광등, 흰 벽면, 흰 바닥, 일렬로 진열된 달항아리···. 전시장에 들어선 사람들은 눈앞의 특이한 광경에 "아!"하고 탄성을 절로 지르게 된다. 감동은 여기까지다. 가까이 다가가 달항아리를 보면 반질거리는 유광 표면에 반사된 형광등 무늬가 빗살무늬처럼 흐른다. 번득이는 형광등 그림자가 달항아리 전체를 점령했다. '이 반사광을 작품으로 봐달라는 의도인가'. 입구에서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감탄은 금세 당황스러움과 의구심으로 바뀐다.

서울 리움미술관의 기획전 ‘여월지항(如月之缸):박영숙 백자’전(20일까지)을 두고 미술계에서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다. "현대미술 매체로서 백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했다"는 긍정론과, "과한 연출로 정작 백자 고유의 아름다움이 묻혔다"는 혹평이 맞서고 있다.

지난해 10월 재개관한 리움은 지난 9월부터 도예가 박영숙(75)의 달항아리 작품 29점을 전시 중이다. 출품작 중엔 국내에서 '가장 비싼 화가' 이우환(86)과 협업한 5점도 포함돼 있다. 이번 논란은 작품 자체보다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논란이 주목받는 이유는 더 있다. 한국 대표 미술관 리움이 선보이는 전시이고, 작품이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고 평가되는 달항아리여서다.


새로운 시도 vs 과한 욕심


전시 도자들은 높이 70cm다. 조선 백자달항아리는 보통 45㎝ 내외다. 전시를 준비한 조지윤 리움 수석 연구원은 "조선시대 17세기 후반부터 만들어진 백자의 전통에서 출발했지만, 박 도예가의 백자는 티 없이 맑은 백색과 70cm에 달하는 장대한 크기를 새롭게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현대적"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반사광이다. 일반적으로 백자는 은은한 조명 아래 전시됐다. '자연스러움' '넉넉함' '푸근함' 등 달항아리의 매력을 차분하게 드러내기 위해 쨍한 조명보다는 PVC나 한지 등으로 광원을 가려 눈부심을 덜어주는 방식이 선호됐다. 지난해 2월 부산 조현화랑에서 열린 권대섭 도예가의 달항아리도 한지 조명 아래 전시됐다.

조 수석 연구원은 "그동안 백자는 전통 공예 작품으로만 보여 왔다"며 "이번엔 그것을 넘어서 작품과 공간을 하나의 거대한 설치작품으로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 디자인엔 정구호 리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 수석 연구원, 박 도예가가 참여했다. 전시 초반 "지나치게 눈이 부시다"는 지적이 일자 밝기를 낮춘 게 현재 상태다.

백자를 빽빽하게 붙여 세운 것도 지적됐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달항아리가 정작 거의 겹치다시피 진열돼 하나하나 감상하기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시 전문 디자이너는 "그동안 도자를 개별 작품으로만 보여준 관습을 탈피하기 위해 파격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며 '도전'에 점수를 줬다. 그는 "전시가 관람객에게 이색적인 경험을 제공한 점에선 성공했다"면서 "그러나 튀어 보이는 것 이상 얻어낸 것이 무엇인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달항아리 조형미는 내려놨다?


달항아리는 도예가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다. 흙이라는 재료의 특성상 크기가 클수록 만들기 굉장히 어렵다. 상·하부의 굽 높이, 어깨 각도, 가운데 부풀기도 모두 다르다. 미술계 중견 큐레이터는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선 차분한 호흡으로 관람객을 이끌어야 했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백자의 새 가능성을 찾기 위해 그동안 중시해온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 결과로 도예가 박영숙은 지워지고 설치작품을 구성하는 매체로서의 백자만 남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정작 달항아리의 조형미는 흰색 공간에서 증발하고, 이우환의 붓 터치만 눈에 띄었다.

중요해지는 전시 공간


지난해 2월 부산 조현화랑에서 선보인 도예가 권대섭의 달항아리 전시. 사진 조현화랑
두 점의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전시된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연합뉴스
최근 몇 년 사이에 미술관과 박물관의 전시 디자인은 크게 달라졌다. 공간과 배치 방식, 조명의 역할이 갈수록 중시되고 있다. 무엇을 보여주느냐 못잖게,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관람 경험의 질을 좌우한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은 고정관념을 탈피한 공간 디자인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이 전시실은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을 나란히 전시하며 "흙벽과 기울어진 벽면과 경사가 있는 바닥, 조명으로 반가사유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 공간을 디자인한 최욱 건축가는 "1m도 채 안 되는 반가사유상을 어떤 높이에서 보여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오묘한 불상 표정에 관람객 시선이 머물게 하고, 뒤의 관람객을 덜 보이게 할 것인가 등을 놓고 고민했다"고 디자인 과정을 설명했다.

김용주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디자이너는 "전시 디자인은 작품을 마주한 관람객이 좀더 풍부한 환경에서 감응할 수 있게 돕는 일"이라며 "관람객이 작품 앞에 오래 머물며 깊이 감상하게 하는 일은 항상 큰 도전"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미술계에서 리움은 공간, 작품, 디자인에서 최고 수준을 뜻해왔다. 그러나 관람객의 눈높이도 높아졌다. 한 공공 미술관 큐레이터는 "그동안 리움은 미술관과 박물관 큐레이터들에게 리움은 많은 영감을 주던 곳이었다"며 "앞으로도 그럴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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