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55>] 술고래에서 금주 전도사로

데스크 2022. 11. 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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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55화 술고래에서 금주 전도사로


눈 내린 거리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되고 캐럴이 신나게 울려 퍼졌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젊은이들의 마음이 후끈 달아올랐다. 가게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느라 출입구 앞에 알록달록한 트리 장식을 세우고 간판과 벽면에 형형색색의 휘황찬란한 조명전구로 치장했다. 사상 최악의 경제 한파 속에 상인들은 행인들의 발길을 잡으려 애썼고 행인들은 들뜬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람들은 상인들의 희망 섞인 바람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예외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술꾼들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연말연시를 맛있게 보낼까 궁리하기에 바빴다. 술꾼들은 술자리 송년모임에 부름을 받는 피동적인 면모를 탈피해서 모임을 자체 생산해내는 적극성을 발휘했다.


요맘때쯤 신문들이 술자리 술꾼과 술에 관한 기사를 우려먹으려고 달려드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신문들은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술 소비량으로 따지고 보자면 러시아 등 동구권에 비견될만한 음주 강국이라며 연말연시 술꾼들의 적극적인 자제를 촉구했다. 그럼으로써 차제에 음주 강국이란 오명을 벗어던지자고 역설했다. 또한 술자리에서 술을 덜 마시는 방법, 술 안 취하는 방법이라며 무슨 대단한 노하우라도 공개하는 듯 야단법석을 떨었다.


신문이 밝힌 술 안 취하는 방법은 먼저 빈속에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안주로는 단백질 함량이 높은 걸 먹어라, 술 마시면서 상대방과 대화를 많이 하라, 등등이었다. 그리고 술 덜 마시는 방법으로 제시한 건 술자리에서 술 대신 물을 많이 마신다든지, 고기 굽기를 자처한다든지, 술 약속 시간보다 늦게 나간다든지 하는 꼼수가 즐비했다. 하지만 신문들의 이런 조언은 사실 하나마나한 소리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그 대상이 불명확했다. 신문은 술꾼을 대상으로 기사를 썼다고 했지만 정작 기사를 소비하는 사람은 술꾼 아닌 일반 독자들이었다. 신문의 노하우는 술꾼들에게 별 무소용인 것들이었다.


노하우는 한 마디로 술을 요령 있게 피하는 방법인데 술꾼은 술을 피하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애당초 안 피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노하우란 게 사실 필요 없었다. 술꾼이 술 취하는 것은 노하우의 사용 여부를 떠나서 대체적으로 술자리가 늦게까지 이어지는 등 워낙 음주시간이 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술꾼이 술 취하지 않는 방법은 술자리를 피하거나 술자리를 일찍 파하거나 둘 중 하나였지 노하우와는 거의 상관없었다. 술꾼들은 거두절미하고 취할 목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족속이었다. 그렇다면 술꾼이 아닌 사람들에게 신문의 노하우는 필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술꾼 아닌 자에게도 그런 노하우는 필요 없는 게 어차피 술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술을 안마시거나 덜 마시게 되어 있었다. 백보 양보해서 상기 노하우가 술 싫어해서 술자리에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에게 필요하다손치더라도 어차피 그들에게 술자리는 연례행사에 불과하지 술꾼들처럼 일상이 아니기 때문에 거창한 비법 공개에 비해 그 효과는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신문이 진정 술 마시는 사회를 걱정한다면 술 덜 마시고 안 취하고 하는 덜 떨어진 소리를 할 게 아니라 술을 마시지 말자고 금주캠페인을 벌여야 할 노릇이었다. 어차피 술꾼이 술 덜 마실 정도가 되면 술꾼이 아니라 술을 자제하면서 즐기는 사람이니 술자리 노하우가 어떻고 비법이 어떻고 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와 달리 술꾼은 과음과 폭음을 일삼는 자로서 술을 자제해서 즐기기 어려우니 무릇 금주를 시켜야 마땅했다. 신문기사는 오로지 술 마시지 못하는 사람, 즉 음주 문외한에게나 그럴듯한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술 마시는 배우자를 둔 주부들이 남편에게 잔소리를 할 때에나 요긴하게 쓰이는 노하우였다.


신문들이 연말 술 관련 가십기사에 열을 올릴 때 J신문은 김석규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해놓았다. 화제의 신간 ‘역전의 용사’ 작가 인터뷰는 박스 기사로 처리했고, 소설 주인공 ‘주경’의 실제 모델 김석규의 인터뷰 기사는 사진까지 배치해서 아주 크게 편집해 놓았다. ‘술과의 전쟁에서 기어이 승리하다!’는 타이틀 아래 ‘수주 변영로에 버금가는 술고래에서 금주 전도사로!’라는 부제가 붙은 신문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리산 자락 어느 산골마을에 소설 ‘역전의 용사’ 실제 모델 김석규 씨가 산다. 지난여름 요양을 위해 전기도 수도도 없는 산골에 들어왔다. 정신병원에서 알코올성 편집망상을 치료하고 본격적인 금주에 들어선지 벌써 4개월이 지났다.


김석규 씨는 한창때 수주 변영로에 필적하는 술고래였다. 또한 음주수행이란 독특한 방식으로 음주를 도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음주 아티스트였다. 수주가 만취해서 백주에 벌거벗고 소를 타는 만행(?)을 저질렀다면, 석규 씨는 술과의 전투에서 피도 눈물도 없이 적을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석규 씨는 당시 국가와 사회를 위해 복무한다는 생각을 가졌었단다. 물론 편집망상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또한 석규 씨는 군기뿐만 아니라 직무유기에 빠져있는 국방부를 질타했는데 오늘날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술이라며 애타고 피 끓는 심정으로 호통을 쳐댔었다. 역전의 용사라 불리는 향토예비군들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최전선에서 젓가락 두들기며 적을 격퇴하고 있는 마당에 국방부에서는 대체 뭐하고 있냐는 반문이었다. 피엑스에 보내든 외출 외박을 보내든 간에 당장 술을 토벌하고 섬멸하라는 작전 지시를 현역군인들에게 내려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사람 안 되는 건 죽어도 안 되는 거다. 돼지삼겹살 지구 전투를 끝으로 전역을 꿈꾸었으나 전황이 여의치 않아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나는 당일 전투, 1박2일 전투를 가리지 않고 계속 참전했다. 지난 1박2일 전투는 정말 치열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깊은 내상을 입고 한 마리 승냥이처럼 은신처로 퇴각했다. 그리하여 열흘 동안이나 고통에 신음하다가 홀연히 정오쯤 일어나서 똥물 대신 탁주 한 사발로 몸을 추슬렀다.’


상기는 석규 씨가 편집망상을 앓기 전 남긴 메모인데 재미있는 것은 편집망상 전에 이미 농담의 전조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농담이 진담 되는 게 아니라 농담이 망상 되었다고나 할까.


요즘 석규 씨의 관심은 금주다. 그것도 혼자만의 금주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하는 금주다. 술을 즐기는 사람에겐 술이 이슬처럼 정신을 맑게 하고 몸을 깨끗하게 해주지만 과음하고 폭음하는 술꾼에겐 술이 독처럼 영육을 망가뜨린다고 석규 씨는 굳게 믿고 있다. 아니 개인만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가정을, 가족을 망가뜨려 결국 국가와 사회에 커다란 균열을 일으킨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국가가 국민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금주교육과 캠페인에 적극 나서기를 석규 씨는 당부한다.


그러나 석규 씨 역시 술꾼들의 금주 실현 가능성이 아주 낮다는 걸 알고 있다. 술꾼은 차라리 술에 몸을 맡겼으면 맡겼지 다른 사람의 조언엔 귀 기울이지 않는 존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석규 씨는 그 옛날 소학을 배울 때처럼 아이들이 초등학교에서부터 술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교육이 필요한 것처럼 술 교육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석규 씨의 확고한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석규 씨의 유의미한 질문을 독자 여러분께 던지고자 한다. 함께 고민하고 반추해 보아야 할 명제와도 같은 질문이라는 판단에서다.


‘혹시 국가와 사회는 경제적 측면에 기대어 국민의 음주를 조장하고 방조하는 건 아닐까요?’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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