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의 신화 제거한 자리에 남은 '모녀의 욕망'
[김상목 기자]
2021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계최초로 공개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첫 상영에 때맞춰 볼 수 있었다. 실은 그 영화를 만든 김세인 감독에 대해서는 단편 시절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감독의 단편 전부를 보진 못했지만 그중 <불놀이> (2018)과 <컨테이너> (2018)를 접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단편 모두 나이어린 또래 여성들이 갈등을 겪어가며 회복할 수 없는 파국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런 암울한 전개가 끝까지 가는 결말이 섬뜩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불놀이>는 야밤에 추수가 끝난 시골 논밭에 쥐불놀이를 하러온 두 친구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정의 종말 이야기다. 내가 무사하기 위해 너를 이용해야 하는, 그야말로 무저갱이 펼쳐진다. 혹은 둘 중 하나는 죽어서 나갈 수밖에 없는 검투사의 투기장 같은 설정이다. <컨테이너>는 여름철 수해를 입은 동네 사람들에게 임시 피난처로 제공된 컨테이너 안에서 두 소녀가 사회적 계급과 동정 없는 세상에 관해 체험하는 잔인한 일기장 같은 내용이다.
두 단편 모두 어쩌면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던 또래 소녀들이 (관객이 그래도 혹시나 하고 기대했을법한) 위로와 화해로 향하는 결말을 사뿐히 배반해버리는 이야기다. 감독은 그런 우울한 결말에 만족하지 않는다. 두 소녀들의 다툼 중에도 주인공에 가까운 캐릭터는 가장 절박하고 고통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친구의 불행과 발악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관찰자 포지션이다. 쉽게 보기 어려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여태껏 참 독한 이야기를 만들어온 감독의 첫 번째 장편을 접했다. 이전 단편들은 딱 단편다운 그리 길지 않은 러닝타임인데 비해 장편 데뷔작품은 2시간20분이라는, 꽤나 만만치 않은 분량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감독의 세계관이나 이야기 전개방식은 그리 차이나 보이진 않는다.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찬란 |
어머니와 딸로 구성된 가족이 있다. 그런데 모녀간에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있자면 과연 이 둘을 과연 누가 가족으로 볼까? 싶을 지경이다. 영화 시작부터 모녀는 '티키타카'와는 차원이 다른 강도로 서로 다툰다. 어머니인 수경은 외동딸 이정을 구박하고 손찌검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좌훈방에서 홀로 생계를 책임져가며 딸을 키워낸 수경은 겉으로는 명랑하고 사교적으로 보이지만 집에서는 종종 발작적 과민반응을 의심케 할 정도로 딸 이정을 몰아붙인다. 반면에 작은 학습지 회사에 다니는 이십대 후반의 이정은 어머니의 정신적-육체적 폭력과 학대에 시달리면서도 독립하지 못하고 한집에서 내내 싸워가며 버틴다. 풍기는 분위기부터 이정은 지나치게 어둡고 수동적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아찔한데 이제 사건은 시작에 불과하다. 둘 사이는 초반이 지나자마자 본격적으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또 한바탕 치고박는 모녀간의 혈투 후, 마트 주차장에서 수경의 차는 이정을 향해 급 발진한다. 어머니가 자길 죽이려 했다고 믿는 이정은 급기야 보험사가 요청한 증인을 받아들이고, 법정에서 두 단출한 가족은 원고와 피고로 만나는 진풍경을 선보인다.
둘의 감정의 골은 이 사건을 계기로 수습 불가의 악화일로를 걷는다.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트렁크 끌고 나온 이정은 직장후배 집에 더부살이를 시작하고, 수경은 남자친구와 살림을 합칠 궁리에 몰두한다. 둘 다 서로 외에 정서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느라 바쁘다. 차라리 이제라도 각자 홀로서기를 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며 관객은 조마조마한 심경으로 지켜보게 된다. 두 주인공은 각자도생을 위해 나름대로 애쓰지만 세상일은 만만치 않다. 이십여 년 간 곪을 대로 곪은 둘의 사이는 서로에게뿐 아니라 각자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부정적 기운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수경이 재혼까지 생각하는 남자친구 종열은 자상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수경의 모든 걸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난제다. 종열에게도 홀아비로 키우는 중학생 딸이 있다. 그는 수경이 좋은 새엄마가 되어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친딸 이정과의 사이도 진저리를 쳐가며 딸을 낳은 덕분에 자기 인생이 꼬였다고 단정하는 수경이 종열의 한창 사춘기를 겪는 딸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기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정은 직장후배 집에 얹혀살면서 그토록 갈구했던 어머니를 대신하는 내밀한 교감과 해방을 만끽하지만 정작 후배는 과도하게 자신에게 집착하며 엄마 역할의 대체재처럼 들이대는 그녀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결국 둘 다 파국을 맞는다. 결국 몇 차례 화해까지는 아니라도 휴전을 모색하던 두 모녀는 서로를 공격하며 악다구니를 부린다. 성격의 차이는 둘의 상대방을 향한 공격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수경은 고성을 꽥꽥 질러대며 손짓발짓 동원해 물리적 구타를 수시로 가하는데 반해, 이정은 소심하지만 강렬한 원한을 담아 수경은 상상도 못했을 복수를 진행 중이다(제목의 비밀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가족'이란 통념에 갇힌 상극의 여자들
수경과 이정, 두 모녀는 각자 문제와 결함을 잔뜩 가진 존재들이다. 수경의 구체적 과거사는 별달리 소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는 대차고 당당해 보이는 면모로 상대하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스트레스를 쌓아놓고 있었고 그 피로감을 순전히 딸에게 다 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딸 이정은 어릴 적부터 꾸준히 수경의 압제에 시달리면서도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이 결여된 부분을 언젠가 채워주기를 기다리며 독립하길 망설인다. 어머니는 딸에게 위로를 원하고 딸은 어머니에게 관심을 바란 것뿐인데 언제부터 그렇게도 서로 엇갈리게 된 것인지, 둘은 끊임없이 서로를 비난하고 원망해가며 졸렬한 공세를 거듭한다.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찬란 |
영화 후반에 들어서면서 수경이 보여주는 태도는 이정뿐 아니라 자녀의 존재 자체에 강박관념이 있는 것 아닐까 싶을 지경이다. 그런 신경질적 태도 때문에 자신을 늘 아끼고 위로해주던 남자친구와의 재혼계획은 번번이 암초를 만난다. 조금만 양보하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사랑받는 가정생활을 이룰 수 있을 텐데도 추호도 그녀는 종열이 원하는 새로운 가족을 수용하지 않는다. 오직 남자친구에게 사랑받는 것만을 추구할 뿐이다. 이쯤 되면 대체 수경이 이정의 생물학적 아빠와 어떤 악연이었을까 조심스럽게 관객은 상상하게 될 지경이다. '자기 배로 낳은' 부류의 상투적 모성애 촉구는 수경에겐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정 또한 그저 수동적인 학대의 피해자로만 보기에는 어긋나는 캐릭터다. 수경이 그녀와 다투다 내뱉는 단말마는 어떻게 보면 이정의 정곡을 찌르는 이해도의 소산일지 모른다. 이정은 오직 어머니인 수경의 사과와 애정을 갈구할 뿐, 어머니를 이해해보려는 시도나 독립해서 거리를 두려는 도전이나 모두 닫아건 채로 정지된 상태다. 수경의 말마따나 이정은 자신을 정서적 쓰레기통 취급하며 스트레스를 풀던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으로 정신적 성장을 멈춰버린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참 오랜만에 인간적 대화가 가능해진 직장후배에게 어머니에게서 얻지 못한 공감과 연민을 끌어내고자 자꾸 집착하다 끝내 외면당하고 마는 운명이다.
그렇게 다시 둘의 주전장으로 돌아온 모녀는 결국 화해 대신 각자 다른 길을 향한다. 이 모녀에게 어머니와 딸이란 규정은 그 존재 때문에 나를 미치게 하는 역귀 그 자체가 아닐까? 하지만 둘은 화해라는 신파적 결론 대신에 이제는 각기 살아남기 위한 길을 모색하며 영화제목의 유래가 된 극중 사건을 넘어서기 위한 마지막 도전을 준비한다.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찬란 |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우리는 쉽게 말하곤 하지만 영화 속 모녀의 피는 서로 밀어내려는 성질을 가진 것처럼 다가온다. 자석의 같은 극처럼 말이다. 수경이 영화 전반에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지나가는 장면에서 눈썰미 좋은 관객은 그녀가 이정을 낳는 과정에서 제왕절개를 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젊은 시절 실수로 원치 않은 임신을 하고 버림받았을 것 같은 수경의 전사가 밝혀지진 않지만 어쩌면 수경에게 딸 이정이란 존재는 그저 임신한 배가 무거워서 억지로 끄집어내다 보니 태어난 존재일지 모른다.
감독은 그래도 엄마가 너무한다는 식으로 흐르기 쉬운 한국사회 속에서 살아온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무참히 짓뭉개버린다. 너무 당당하게 그 오래된 통념을 부숴버리기 때문에 관객은 감독의 의도를 진저리 치면서도 궁금할 수밖에 없게 된다.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하게 전개되는 사회적 배경과의 연결이나 가족 드라마의 전형적 구성을 배제한 작품은 역설적으로 감독의 어머니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완성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한때 불안정한 영화의 길로 진로를 정하려던 딸과 모녀간에 격한 갈등이 있었고, 그 시기를 회상하며 감독은 그런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가족이라는 혈연관계 때문에 오히려 응어리진 채로 쌓이기만 한 상태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는 이야기를 구상했을 테다.
영화는 감독의 극한 비전을 구현하기 위한 배우들의 '빙의'급 연기로 온전하게 구현된다. 어머니 수경 역의 양말복 배우와 딸 이정 역 임지호 배우는 각각 본 작품으로 국내 대표적 영화제들인 부산국제영화제 배우상(임지호)와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양말복)을 수상하며 감정소모가 어마어마했을 연기 노력을 인정받았다.
단지 연기를 잘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이를 소화하기 위한 단단한 각오로 임했을 게 분명하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모녀간의 살벌한 대립을 보면 공감하게 되리라 믿는다. 여기에 어머니와 딸에게 각각 애정을 갖고 도우려 하지만 끝내 둘의 한계에 나가떨어지고 마는 수경의 남자친구 종열 역 양흥주 배우와 이정의 직장동료 소희 역 정보람 배우 역시 독립영화계에서 널리 검증된 실력이 명불허전임을 각인시켜준다.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생활연기 가운데 문득 서로에 대한 실망과 애증을 폭발시키는 조화로운 연기에 감탄하고 말 테다.
그렇게 극한으로 확장된 선연한 갈등의 연쇄폭발에 관객은 꼭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상황을 몰고 가야 되나 진저리를 칠 게 분명하다. 지금껏 한국독립영화에서조차 관습적으로 온전히 포기하지 못한 채 (감히 의심하지 못했던) 모성애의 전형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그 형벌과도 같은 순간이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서 독하게 마음먹고 구현된다.
한 핏줄로 이어지는 데다 부자 관계에 비해 더 정서적으로 서로 의존하는 특성상 좋은 것뿐만 아니라 잊고픈 것도 떨쳐내는 게 불가능한 모녀관계를 놓고 극한의 상상이 펼쳐지는 영화다. 그래서 소름이 돋을지언정 감독이 어디까지 끌고 가나 한번 확인해보자며 관객으로 하여금 끝까지 버티게 만드는 위력이 있다. 김세인 감독은 단편에서부터 이어온 도전을 감독경력을 걸면서까지 비타협적으로 "끝까지" 간다. 그 감정의 경계선이 궁금하다면 마음 굳게 먹고 도전해볼 일이다.
<작품정보>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The Apartment with Two Women
2021|한국|드라마
2022.11.10. 개봉|140분|15세 관람가
감독 김세인
주연 임지호(이정 역), 양말복(수경 역)
출연 정보람(문소희 역), 양흥주(중열 역), 이유경(애정 역), 권정은(소라 역)
각본 김세인
촬영 문명환
녹음 박송열
음악 이민휘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배급 찬란
제공 영화진흥위원회
2021 26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 올해의 배우상(임지호),
KB뉴커런츠 관객상, 왓챠상,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상
2021 47회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양말복)
2022 10회 무주산골영화제 뉴비전상(대상)
2022 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발견-대상
2022 3회 합천수려한영화제 대상
2022 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2022 24회 우디네극동영화제 경쟁
2022 51회 뉴디렉터스/뉴필름 영화제
2022 18회 코스모라마국제영화제
2022 9회 헬싱키시네아시아
2022 24회 타이베이영화제
2022 55회 멜버른국제영화제
2022 75회 에딘버러국제영화제
2022 7회 런던아시아영화제
2022 23회 도쿄필멕스국제영화제
2022 67회 스페인바야돌리드국제영화제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사람들이 정말... 이태원 참사에서 5.18을 떠올리다
- 검찰, 민주당사·국회 본청 동시다발 압수수색 시도
- 10월에도 74명이 퇴근하지 못했습니다
- 아픈 나를 위한 밥상, 오늘은 냉동 뭇국입니다
- [단독] 대통령경호처 직원들, 코바나 지키며 이사 도왔다
- 조선호박으로 끓인 수프 맛은 이게 다릅니다
- 이태원 참사 '책임자' 7인의 행적, '빼박'입니다
- 김은혜의 '웃기고 있네'... 여권에서도 "'무조건 잘못했다' 해야지"
- 천안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 훼손... 경찰 " 증거확보, 수사 진행"
- 비대면 수업 기간에 대규모 진로특강?... 앞뒤 안 맞는 교육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