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아메리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오랜만에 한국에 온 친구는 “이건 아메리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건데…”를 반복했다. 미국에 이민 간 화가지만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마쳤고 영어보다는 한국말과 관습이 훨씬 편한 친구였다. 20년 가까이 미국에 사는 동안 한국 사회가 많이 변했다며, 생경한 광경을 볼 때마다 튀어나오는 일종의 감탄사였다. 화가답게 세상을 한 발짝 떨어져 보며 관조하는 안경 같은 것이었다. 미국 대신 굳이 ‘아메리카’라고 말하는 것은 속물근성에 찌든 교포가 철없이 모국을 비하하는 푸념은 아니라는 알리바이 같은 장치이기도 했다.
‘물은 셀프’라는 야박한 구호가 붙은 식당에서 스스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을 때는 아메리카가 등장했다. 퇴근 시간 교차로마다 꼬리를 무는 자동차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도 옴짝달싹 못 하고 갇혀 있을 때, 경찰관 한 명이면 이 야만적인 체증이 풀릴 듯한데도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 아메리카를 되뇌었다. 아메리카는 반드시 우월하거나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능숙하게 컴퓨터를 다루며 재빠르게 민원 업무를 처리하는 공무원들을 보며, 시간 맞춰 나타나는 버스에 올라타며, 동네마다 24시간 문을 연 편의점에 들어서며 “이건 아메리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외쳤다.
대부분 그가 살았을 때와 달라진 한국의 모습에 놀라며 내뱉었지만, 그가 한국에 사는 동안 보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아파트 단지의 조경은 공원만큼 말끔하지만 담장을 벗어나면 그가 살았을 때의 연탄재가 있던 골목과 다를 바 없는 환경, 지하철 입구 계단이 가파른데도 안전 손잡이 없이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밀려 내려가는 광경은 잊었던 익숙함에 대한 감탄이자 탄식이었다. 대개는 유쾌한 대화의 소재이거나 화석같이 굳어진 교포의 퇴행적 기억에 대한 자조적 고백 같은 것이었다.
때로는 선행적 경험, 특히 안전이나 공공에 대한 감수성 같은 도시적 감각에 대한 차이를 드러내기도 했다. 지하철에 대한 찬사가 그랬다. 전자식 개표기와 푹신한 의자에 예의 아메리카가 튀어나왔다. 토큰을 넣고 내부는 잠수함 같다고 놀림당하는 뉴욕의 지하철에 비하면 한국의 지하철은 미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가 말하던 ‘아메리카에서는 상상도 못 하던’ 지하철의 푹신한 의자는 결국 화재에 불쏘시개가 돼 대참사로 이어졌다. 도대체 지하철에 불이 날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금연 구역이니 불씨라고는 없을 줄 알았는데 방화가 일어날 줄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로 한국 지하철은 아메리카처럼 딱딱하고 불편하지만 불에 타지 않는 재질로 바뀌었다. 이렇게 보면 친구가 말하는 아메리카는 단순히 미국이라는 나라라기보다는 도시의 경험 차이였고, 좀 불편하고 늦더라도 안전과 공공을 먼저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듯싶다.
아메리카의 두 번째 용례는 도시의 중간 영역에 관한 인색한 관심과 배려였다. 도시의 광장과 대로는 깔끔하고 안전하며, 사적인 개인 공간은 호텔만큼 화려하다. 하지만 그사이의 모호한 골목은 누구의 것도 아니어서 방치돼 있다. 사실은 모두의 것, 이웃의 공간이다. 이태원 참사는 사건이 일어난 골목이 경사지였던 게 큰 원인 중 하나였다. 건축물 내부 공간이었다면 계단이나 핸드레일 설치가 의무였을 정도로 가파른 경사였다. 장애인 시설까지 잘 갖춰진 대로변이나 사적 공간에 관한 관심과 배려와 달리 관리주체가 모호한 중간 영역을 방치한 결과이기도 하다. 마치 아파트 단지의 조경과 담장 밖 골목의 대비처럼 선명하지만 알아채지 못했던 공공공간에 관한 무관심의 대가이기도 하다. 역사 도시에서 확장하고 발전해서 구릉이 많은 서울의 특성상 중간 영역의 공공공간은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데도 말이다.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게 건축가의 첫째 임무인데도 “아메리카에서는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일인데…”만을 무기력하게 되뇌기만 하는 흐린 늦가을이다.
이경훈 국민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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