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너무 많은 죽음, 너무 큰 슬픔
오봉역 작업 30대 근로자 사망
거리도 일터에도 안전은 없었다
너무 많은 젊은이가 생명을 잃었다. 한류에 매혹돼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도 있었다. 사망자는 156명.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했던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이태원 참사는 ‘156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156번 일어난 것’이다. 그 무게감을 헤아릴 길이 없다.
한국이 세계 무대에 문화국가로 도약하는 시점, 믿기지 않는 비극이었다. 외신(워싱턴포스트)마저 “삼풍 참사 이후 27년 동안 한국은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지 의문”이라고 질타했다. 마땅히 예상되는 인파에 대한 대비가 없었고, 사고 발생 이후 대응 또한 총체적으로 부실했다. 권력자 중 누구도 먼저 ‘내 책임이다. 죄송하다’고 조아리는 이가 없었다. 대통령 등의 사과가 나온 것도 참사 며칠 후, 비판 여론이 들끓은 후였다. 희생자 아닌 사망자, 참사 아닌 사고란 용어를 고집하며 유가족과 국민에게 더 상처를 줬다.
젊은이들이 놀러 갔다 생긴 일이든, 행사의 주최자가 있든 없든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일은 국가의 기본 책무다. 용산경찰서장은 관용차량을 고집하느라 걸어서 10분인 사고 현장에 50분 만에 도착했다. 대규모 인파에 따른 안전사고를 우려한 일선의 보고서는 무시됐고, 참사 후 삭제를 지시한 정황마저 드러났다. 용산구청장은 7일 국회 행안위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면서도 “마음의 책임”이라고 토를 달았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같은 자리에서 “무한책임을 느낀다”고 했다가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으로부터 “장관은 구체적 책임을 지는 자리다. 무한책임이라는 추상적인 말로 면피하지 말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장관은 사퇴 의사는 없다고 했다.
온라인에는 가짜뉴스, 음모론이 나돈다. 정치 공세의 호기로 여기는 일부 야권 스피커들은 미확인 가짜뉴스, 논리의 비약을 불사한다. 반대로 소수지만, 정권 비판 세력이 이번 참사를 유도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도 있다. 세월호라는 비극을 겪고도 우리 사회의 공적 위기대응 시스템이 이 지경인 걸 다시 정파 싸움으로 몰아간다면, 그건 분열의 무한루프일 뿐이다. 진상을 규명하고, 합당한 법적·정치적 책임을 물으며,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는 일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이태원 참사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경기도 의왕시 오봉역에서는 5일,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소속 30대 근로자가 화물열차 야간작업을 하다 사망했다. 지난달 SPC 계열 제빵공장에서 20대 여성 근로자가 소스 배합기에 끼여 사망한 지 한 달도 안 돼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1∼8월 산업재해로 숨진 근로자는 432명. 하루에 두 명꼴로 사망한 셈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있지만 코레일에서만도 올해 네 번째 산재 사망사고다. 이태원 참사 직후 누군가 ‘우리 젊은이들은 일터에서도, 놀러 가서도 죽는다’고 애달파하던 게 떠오른다. 설상가상으로 6일 서울 영등포역 인근에서는 무궁화호 열차 탈선사고까지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북 봉화군 광산에서 매몰 221시간 만에 기적적으로 구조된 두 사람의 광부다. 커피믹스 30봉을 나눠 먹으며 버텼다. 달달한 커피믹스는 요즘 ‘K커피’로 해외에서도 인기라는데, 고된 작업장에서는 에너지를 회복하고 카페인 각성 효과로 노동집중도를 높이는 ‘노동음료’ 역할도 한다. 노동음료가 생명줄이 돼 준 상황. 구조된 광부 박정하씨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광부들에게는 없는 사람들끼리 끈끈한, 남다른 동료애가 있다”며 “동료들이 구조를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동료가 유일한 희망이었다는 얘기다. 박씨는 또 “사고가 나기 하루 전 안전점검에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며 겉핥기식 안전점검의 문제도 지적했다. 라디오 진행자는 그에게 “살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는데, 동감이다. 일터에서든, 거리에서든, 놀이 공간에서든 더는 안타까운 죽음이 없는 안전한 세상은 언제일까. 이번에도 우리 사회가 배우지 못한다면 희망은 없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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