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공권력에 희생된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
[이지애 기자]
작년 이맘때, 5.18의 핵심 책임자 전두환은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끝내 진심 어린 사죄 없는, 응당한 죗값을 치르지 않은 그의 사망이 5.18 광주민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퇴색시키는 데 일조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아직도 아물지 않는 통한의 고통 속에서 유가족들은 힘겹게 견디고 있을 텐데 말이다.
5.18을 소재로 한 저작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2014년 출간된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가 단연 돋보인다. 1970년 광주 출생인 작가가 고증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5.18 당시 희생자와 살아남은 이들의 절규를 통해 5.18의 상흔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2017년 이탈리아에 번역 출간되며 이탈리아 문학상인 말라파르테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작가 한강은 수상소감으로 이렇게 밝혔다.
"존엄과 폭력이 공존하는 모든 장소, 모든 시대가 광주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나를 위해 쓴 게 아니며 단지 내 감각과 존재와 육신을 (광주민중항쟁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 살아남은 사람, 그들의 가족에게 빌려주고자 했을 뿐이다."
▲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
ⓒ (주)창비 |
이 소설의 가장 빛나는 지점은 이 인물들의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내면을 작가가 직접 겪은 것처럼 고스란히 복원해 낸 점이다. 친구가 쓰러지는 걸 보고도 뛸 수밖에 없었던 어린 동호는 도청 상무관으로 들어오는 시신들을 수습하며 죽은 친구를 떠올리고 괴로워한다. 시위에서 쓰러져 암매장된 동호 친구 정대를 영혼의 목소리로 대변한 점 또한 인상 깊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5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85쪽)
23세 교대 복학생의 처절한 심정도 독자에게 절절히 와닿는다. 잔악한 고문에 영혼을 깊이 베인 그는 출감 후 십여 년이 지나도 여전한 불면과 악몽에 시달린다. 진통제와 수면유도제의 힘으로 체념과 슬픔과 원한 속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다. 같이 복역했던 진수마저 고문 후유증과 정신적 트라우마로 자살해 버리자 그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135쪽)
공권력에 아픈 이들에게 권하는 책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207쪽)
결국 이 소설은 5.18뿐 아니라 극악한 폭력의 서슬 앞에서 목숨 걸고 대항했던 분들에게 지극한 위로가 된다. 작가는 폭압 받던 이들의 심연에 내려가 그들과 한 몸이 되어 심정을 토해냄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함께 아파한다. 덕분에 독자는 작가를 징검다리 삼아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 속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들의 마음에 비로소 닿을 수 있다.
죄 없는 젊은이들이 또 변을 당했다. 대열에 깔린 채 극도의 공포 속에 떨던 젊은이들의 심정이 8년 전 세월호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어린 학생들의 심정과 무엇이 달랐겠는가? 왜곡되었던 5.18을 바로잡고자 외쳤던 구호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 다시 거리에 울리고 있다고 한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저버리거나 정당한 목소리를 억압하는 정부는 그 존재의 정당성을 잃는다는 걸 또 상기해야 하는 걸까?
무자비하게 자행된 공권력에 여전히 아파하는 이들을 기억하고 위로를 전하고 싶은 이들에게 소설 <소년이 온다>를 권한다. 오늘날 우리가 공기처럼 누리는 자유와 권리를 숭고히 여기는 마음으로 눈을 부릅뜨고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으로 응답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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