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노골드, 생산지에선 이렇게 끓여 먹습니다 [보그(Vogue) 춘양]

김은아 2022. 11. 8.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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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집 난 사과 알뜰하게 먹는 법... 춘양 할매들에게 귀한 대접 받는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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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기자]

입동이 지났다. 가을이 깊어간다 싶더니만 겨울이 냉큼 와버렸다. 골목 앞 연탄재를 가득 실은 작은 손수레가 씩씩하게 겨울을 지킨다.

어린 시절엔 연탄보일러 위에 큰 솥을 올려두고 서열대로 따뜻한 물을 한 바가지씩 떠다가 씻었다. 맞벌이했던 부모님 덕분에 엄마는 언제나 내가 학교 다녀오면 연탄보일러 구멍을 몇 개 열거나 닫거나 구체적인 지령을 내리셨다.

불을 꺼치면 고뿔도 걸리고 온 가족이 춥게 자야 하니 비록 초등학생 조무래기였지만 난 정성스럽게 바람구멍을 내고 닫았다. 깊고 진한 아침 햇살이 서리를 비추며 여유 있게 올라온다. 윗마을 꽁시여사께서 알려주신 사과우유차 한 잔에 속을 데우며 눈으로 마음으로 피부로 찬찬히 겨울을 음미한다.

시나노골드의 마지막 수확기
 
▲ 황금빛 시나노골드 황금빛으로 숙성된 시나노골드다. 시장에 내다파는 것은 10키로에 6-7만원이고 흠집사과는 한 컨테이너(20키로)에 7만원에 팔린다. 말이 흠집이지 내 눈엔 뭐가 하자인지 잘 모르겠다. 조금 못생긴것이나 약간 벌어진 열과들이 대부분이다.
ⓒ 김은아
 
춘양은 일교차가 평균 15도 이상 나기 사과가 자라기엔 매우 좋은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평생 먹어본 사과 중에 봉화 춘양사과가 최고로 맛이 좋다.

가으내 반사 필름을 깔아 사과를 골고루 붉게 익히던 부사도 거의 자취를 감추고 극히 일부만이 이 추위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익성이 좋아 근래에 인기가 많았던 시나노골드, 일명 '황금사과'도 수확을 마치고 몇 알만이 대롱대롱 달려있다.

춘양에서도 일교차가 20도까지 벌어지는 춘양면 서벽리. 얼마 전 시나노골드 마지막 수확을 위해 수진이네 집에 모여든 할매들 일손을 도우러 갔다. 할매들은 노련하게 사다리도 타고 사과도 골라내시며 너울너울 일하신다. 일머리 없는 내가 걸리적거리는 할매들은 가만히 앉아 사과나 먹고 놀라고만 하시지만 그래도 틈새를 찾아 못난이 사과를 따로 모아 노란 컨테이너에 담는다.

시나노골드는 참 빛깔이 아리하게 이쁜 것이 먹기도 아깝다. 그럼에도 같은 색감에 맛과 향기가 탁월한 모과는 못생겼다고 타박을 받으니 '사람의 판단'이라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라는 생각을 잠시 한다.
 
▲ 시나노골드 수확 춘양면 서벽리 사과밭에서 시나노골드를 수확했다. 저장성이 높지 않아 부사만큼 오래가지 못한다. 밭에서 즉시 따먹는 사과 맛은....이 곳이 아니면 맛볼수가 없는 맛이다.
ⓒ 김은아
밭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나에게 꽁시할매가 총총총 다가오신다. "깎아 먹어. 새가 파먹은 거랑 상처 난 거 도려내면 돼" 하며 과도를 내주신다.

"저는 껍질째 먹을래요. 옷에 문질러 닦아서 먹어도 안 죽어요."
"하하하! 그래! 젊어 맷돌 튼튼하니 씹어 무라."

꽁시할매 손주들은 할매가 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박꽁시여사라고 부른다. "갖고 놀다 제 자리만 갖다 놓아라. 그럼 된다!" 하시며 당신의 꽁시됨을 부인하지는 않으신다. 꽁시할매는 사실 평생 사과 농사를 지으셨다.

"종류대로 사과 키워봤는데 사과는 부사가 제일이야."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한국 사람이라면 하루에 한 번은 뱃속에 반드시 밥테기가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친정엄마 같다. 오랜 세월 사과의 지존은 부사였다. 단단하고 달콤하고 저장이 잘되면 여름까지 먹을 수 있는 사과, 아무리 맛좋은 아리수, 감홍, 시나노골드가 나온다 해도 사과가 나올 때면 꼭 먹는 부사가 아니겠는가!

"시나노골드는 때깔이 좋고 맛도 괜찮은데 좀 싱거워. 내 입엔. 그런데 요즘 사람들 시나노골드 많이 찾아. 세월이 변했나 봐. 우리는 부사가 좋은데 말이야."
"그런데 끓여 먹기엔 골드가 부드러운 맛은 있어."

"사과를 끓여 먹어요?"
"나이가 들수록 자꾸 힘에 부치니 맥아리가 없어져.... 특히 겨울 되면 더하지. 그럼 영감이 못쓸(시장에 못 팔) 사과를 솥에 넣고 푹 끓여서 꿀을 타서 주거든? 며칠씩 몸살 나면 영감이 항상 사과국을 끓여서 먹여. 속이 따뜻해지면서 조금씩 기력이 나거든.... 고기를 못 먹으니까 영감이 전지분유랑 꿀을 섞어서 주곤 했어."

꽁시할매는 사과국이 그리운 것보다 얼마 전 하늘나라로 가신 할배가 몹시 그리운 것 같았다.

우리 마을 이바구의 지존 약초 가게 김 사장님이 한 마디 거드신다. "할매요! 우리 어릴 적엔 사과를 방바닥에 막 굴려 방구들에 뎁혀 먹었다 아닙니껴?" 김사장님 어릴적이라고 하면 50년도 전이니 까마득한 1970년대다.

"아(이)들이 개구지게 먹은 거지. 밤에 배고파 잠은 안 오고.... 그러니 먹는 사과를 저들끼리 집어 던지고 놀다 아침에 일어나서 사과를 쪽쪽 빨아먹었지. 얼마나 단것을 먹고 싶었으면 그랬나 몰라.... 참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지...."

"할매요, 그래도 얼마나 맛있었는지 몰라요. 따끈하게 달큰한 것이.... 그냥 구들밑에 놓은 사과보다 때려서 뎁힌 사과가 훨씬 달고 맛이 좋았잖아요?" 하며 꽁시할매의 동의를 구하신다. 이바구 까는데 능하신 김사장님이라면 어린 시절에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셨을 것 같다.

"봐봐. 새가 쪼아먹은 사과를 먹어봐. 맛이 기가 막히거든? 사과가 충격을 받으면 당도가 올라가. 그러니 새가 쪼아먹은 사과를 골라먹으면 결코 실패할 일이 없어지는거지!"

그럴싸해보이는 논리이지만 까치가 단내를 맡고 골라 쪼아먹을 수도 있는 일이다. 올해 시나노골드, 부사, 감홍 등 까치들이 하도 쪼아먹어서 흠집사과가 더 많다. 골칫덩이 까치가 사과 맛은 기가 막히게 안다.

김사장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과학적으로 사과가 충격을 받아 당도가 올라가지는 않는다. 다만, 충격에 의해 과육에 남아있는 전분이 당으로 전환되는데 이때 사과의 에틸렌가스(식물호르몬)가 당전환을 촉진시키면서 복잡한 당구조가 단당구조로 변하면서 맛이 더 달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과국 레시피를 공개합니다

'때려먹는 사과'의 또 다른 이름은 '상처난 사과'이고, '데워먹는 사과'의 또 다른 이름은 '사과구이' 쯤 되어보인다. 실제 유럽이나 북미에서는 사과를 오븐에 굽거나 시나몬(계피)을 넣어 애플사이다로 끓여 전통음료로 마시니 말이다. 시장기준에 미달하는 소위 못난이 사과라도 용도가 모두 있다.

사과산지인 봉화에서는 사과를 수확하는 즉시 분류하여 마을 주민들과 나눠먹고 나머지 못난이들은 대부분 즙공장으로 가서 사과즙이 되어 저장고에 보관된다. 시중에 파는 사과즙과는 선도가 비할수 없어 맛이 탁월하다. 여름엔 얼려서 사과샤베트로 먹어도 일품이다.

사과는 못나면 못난대로 상처가나면 상처가 난대로 사람의 손을 거쳐 훌륭한 음식으로 거듭난다. 안데르센의 동화 썩은 사과와 당나귀처럼 비록 썩은 사과지만 할머니는 사과 식초를 만들지 않았는가. 물론, 당나귀의 가치는 별 건으로 하고 말이다.

나의 작은 노동에도 불구하고 노란 황금사과 한 바구니가 내게도 돌아왔다. 꽁시할매가 가르쳐준대로 사과국 한 잔에 피로를 녹여본다. 다음은 꽁시여사님이 알려주신 사과국이다.
 
▲ 못난이 시나노골드 흠집사과 수박처럼 가운데가 쩍 벌어진 사과다. 당도가 너무 높아 그러려나 했는데 칼슘이 부족하면 발생하기도 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래도 맛은 끝내준다. 벌어졌어도 쉽게 상하지 않아 신기하다.
ⓒ 김은아
 
▲ 사과국에 들어갈 흠집사과 사과국에 넣을 사과는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 껍질째 먹는 것이 좋다
ⓒ 김은아
 
▲ 흡집난 시나노골드 손질 흠집난 부분을 오려내고, 씨앗을 제거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씨앗만 제거해서 최대한 씨앗을 둘러싼 갈빗대같은 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영양가가 아주 많아서 이 부분은 삶을 때 꼭 넣어야 한다고 꽁시 할매께서 말씀하신다.
ⓒ 김은아
 
▲ 시나노골드 다지기 국에 우릴 것이라 최대한 잘게 써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채썰기를 했다.
ⓒ 김은아
 
▲ 사과국 잘게 썬 시나노골드를 물을 부어 끓인 다음 꿀이나 시나몬(계피) 을 넣어 같이 마시면 근사한 사과국이 된다. 목이 잠기거나 아침에 잠이 덜 깼을때 마시면 눈이 '팍' 떠진다.
ⓒ 김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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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최상품이냐 못난이냐도 어쩌면 시각적인 기준인지도 모릅니다. 안데르센도 썩은 사과 이야기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어르신들은 특히나 허리가 휘도록 농사를 지어 버릴 것이 더욱 없다고 하시는데요. 실제로 아예 곪아터진 사과가 아니라면 어르신들은 요모저모에 사과를 많이 쓰셨습니다. 김치 담글때도 무조각처럼 넣으시고, 말려서 무말랭이처럼 무쳐드시기도 합니다. 신선한 것은 신선한대로 묵은 것은 묵은 대로, 못난 것은 또 못난 대로 맛은 변함이 없으니 다양하게 쓰이는 사과! 우리 인생도 각자의 개성값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날입니다. 따뜻한 사과국 한잔 드시고 행복한 겨울 시작하세요! 이글은 봉화문화원 소식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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