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경찰 총수의 ‘비(非)사과 사과’
타이밍(적시성)과 진정성. ‘말’이라는 메시지로 대중과 소통하는 정치 커뮤니케이션에서 핵심 요소로 꼽히는 두 요소다. 의사소통에서 주안점을 둬야 할 건 ‘무엇을 말하는가’(메시지의 내용)보다 ‘어떻게 말하는가’(화법과 태도)라고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말한다. 더 나아가 ‘어떻게 들리는가’가 주목받는 시대다. 무슨 말을 했느냐보다 소통 상대가 화자가 말한 의도대로 받아들였는가가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미증유의 참사. 이태원 핼러윈 압사 사고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경찰이 보인 모습은 이해가 안 가는 게 한둘이 아니다. 치안총수인 윤희근 경찰청장이 드러낸 언행은 더 그렇다. 지난 1일 언론 카메라 앞에 선 윤 청장의 ‘이태원 사고 경찰청장 브리핑’은 사고 후 사흘 만에 나온 대국민 사과였다. 타이밍이 많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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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 사흘 만의 윤 청장 입장문
책임 당사자가 남 일 얘기하듯
진심 어린 사과, 치유의 첫걸음
」
진정성 측면에서도 의문을 품는 시각이 꽤 있다. 압사 위험을 다급하게 알리는 112 경찰 신고 녹취록의 공개를 앞두고 윤 청장이 갑자기 입장문을 발표해서다. 경찰 내부에서 쉬쉬했다는 녹취록이 야당의 계속되는 제출 요구로 공개가 불가피한 상황이 되자 예정에 없던 사과문을 내고 고개를 숙인 것 아니냐는 것이다.
윤 청장이 발표한 사과는 국민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1123자 전문을 뜯어보면 ‘실패한 사과’의 전형에 가깝다. 사과에 관한 잘못된 고정관념과 신뢰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책 『쿨하게 사과하라』에 따르면, 사과할 때 쓰지 말아야 할 금기어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미안해’ 다음에 나오는 ‘하지만’이란 불필요한 접속사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때 그랬던 것은~” 하고 이유를 붙이면 구차한 변명으로 이어지기에 십상이다. 두 번째는 ‘만약 그랬다면, 사과할게’라는 식의 조건부 사과다. 세 번째는 ‘실수가 있었다’고 하는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이다. 사과의 주체를 모호하게 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속내가 숨어 있다.
윤 청장의 사과문이 딱 그렇다. “사고 발생 직전 심각성을 알리는 112 신고가 다수 있었던 것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현장의 대응은 미흡했다는 판단을 했다” 등에서다. 참사 전후 총체적 난맥상을 노출한 경찰의 부실 대응은 하나하나 열거하다 보면 분노가 치밀 정도다. 사고 당일 야간 당직 책임자였던 서울경찰청 112 종합상황실 상황관리관은 자리를 비웠고,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은 사고 발생 1시간 21분이 지나서야 늑장 보고를 받았다.
윤 청장 본인도 윤석열 대통령이 당일 소방 당국을 통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대처에 나선 시각에 충북 제천의 한 캠핑장에서 잠자리에 들어 사안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경찰의 무사안일주의와 공백 상태였던 지휘보고 라인이 사태를 키웠는데, 그런 경찰 수장이 ‘현장의 미흡한 대응’을 질책하며 마치 남 일 얘기하듯 말했다.
1970~80년대 미국의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였던 어빙 고프먼 전 UC버클리 교수에 따르면, 이런 태도는 실수(Mistake)나 과오(Wrongdoing)를 저지른 ‘존재’는 인정하되 책임이나 자신과의 연관성은 부정하거나 거리를 두는 자세를 보인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과가 아니다. 사과 아닌 사과라는 뜻의 ‘비(非)사과 사과’(Non-apology apology)의 한 유형으로 규정된다. 7일 국회에 나온 윤 청장이 의원들 추궁에 “좀 더 엄정하게, 신중하게 하지 못했다는 질책을 하신다면 달게 받겠다”고 한 것 역시 조건부 사과이자 반쪽짜리 유감 표명일 뿐이다.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9·11 테러 이후 미국의 국가안보위원회 대테러 최고자문담당관 리처드 클라크는 진상조사위원회 청문회 모두발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을 보호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 여러분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을 실망시켰습니다. 이런 실패와 실망에 대해 여러분의 이해와 용서를 구합니다.” 발언 배경을 놓고 비판적 해석이 없지 않았지만 유가족과 국민 앞에서 필요한 행동을 했고 유의미한 ‘정화’ 효과를 가져왔다는 평가가 더 많았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발인이 치러졌고 국가애도기간도 끝났다. 철저한 진상 규명과 이를 통한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 등 앞으로 갈 길이 멀다. 무엇보다 1차 생명선을 지켜내지 못한 경찰이 무고한 희생자와 부상자 가족, 그리고 비탄과 충격에 빠진 국민 앞에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게 무너진 신뢰 회복과 치유로 가는 최소한의 첫걸음이다.
김형구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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