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의 조건
슬픔을 넘어 황망함에 분노까지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또 이런 참사가 일어나고야 말았구나”라는 자책과 자학의 감정이 사람들의 가슴을 짓누른다. 한국사회는 다시 한번 기요틴(Guillotine) 앞에 선 것처럼 집단으로 죄인이 된 느낌이다. 대형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진상규명을 촉구했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지난달 29일 서울 이태원에서 발생한 압사 참사 같은 대규모 안전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할 수는 없을까.
경험에 비춰볼 때 대형참사 진상규명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형사적 처벌을 위한 수사 과정보다는 더 폭넓은 실체적 진실 발견이 필요하다. 둘째, 유가족과 모든 국민이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진상규명이어야 한다. 셋째, 누군가를 부당하게 지목해 비난하거나 누군가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진상규명이 아니라 재발 방지가 최종 목표가 돼야 한다.
내용상으로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은 크게 세 갈래로 진행돼야 하고 아마 그렇게 될 것이라 믿고 싶다. 예방의 실패, 대응의 실패, 구조의 실패가 바로 그것이다. 단계별로 경찰과 소방, 지방자치단체, 교통수단을 관리하는 서울교통공사는 물론이고 이태원상인회 등 이해관계자들이 각각 실제 어떤 행동을 했고, 해야 했고, 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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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 안전사고는 진영·당파 떠나
예방·대응·구조 실패 원인 밝혀야
재발 방지 위한 철저한 조사 필요
」
조사 결과 보고서에는 특정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행동 불비와 기관의 잘못이 적시돼야 한다. 관료주의적 매너리즘은 이번에도 반복됐다. 반드시 타파해야 한다. 더 나은 예방, 더 나은 대응, 더 나은 피해 구조가 진상규명의 최종 목표다.
진상규명 과정에서 당국이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정치적 의도를 갖고 하는 조사라고 비칠 경우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국민이 조사 결과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진상규명 조직은 당파성을 띠지 않는 중립적인 모습을 갖춰야 하고,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공격하거나 맹목적으로 방어하는 싸움의 장으로 변질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가 온 힘을 쥐어짜서 만들어 냈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와 사회적 참사 특조위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필자가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다. 정치적 싸움의 장에서는 실체적 진실이 발견되지도 않고, 재발 방지를 위한 국민적 교훈을 얻을 수도 없다는 점이다. 칼자루를 쥔 사람들은 정치적 이해타산을 진상규명보다 앞세우고,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방패로 무장해 꼿꼿하게 진상조사에 저항하는 모습으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참사,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1999년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참사, 2014년 세월호 참사, 2022년 이태원 참사 등 대한민국에서 어린 생명이 대형 참사로 목숨을 잃는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자연재해가 아닌 참사로 어린아이들이 자꾸 희생되면 국민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공동체 존립의 명분이 상실된다. 그저 고속 성장 와중에 앞만 보고 달려왔던 우리나라가 참사 재발을 막으려면 철저한 진상 규명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이태원 참사는 피해자들이 정치적으로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생명을 앗아갔다. 진상규명은 진영과 당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결단코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대단한 과학도 아니다. 사실과 증거를 모으는 절차이며, 공공과 민간 영역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다.
세월호 특조위에서 검토했던 미국의 대형재난 진상규명 보고서 중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문명은 언제나 교훈과 참사 사이의 대결이다.” 참사를 통해서는 반드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손을 잡고 반드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않는 사회는 또다시 실패한다.
대형참사 유가족과 국민은 오로지 이번 사고의 진실을 알기를 원하고 숨김없는 증거의 취합을 원한다. 우리 국민은 찢어지는 가슴으로 진상규명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이를 통해 정책결정자들이 변화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매서운 눈으로 지켜볼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민후 세월호 및 사회적참사 특조위 참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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