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딸을 차로 치었다? 베를린이 주목한 ‘애증의 한국 모녀’

나원정 2022. 11. 8. 00: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서 엄마 수경(양말복·오른쪽)과 독립하지 않고 엄마와 한 집에 사는 딸 이정(임지호) 사이의 갈등은 자동차 사고를 두고 악화한다. [사진 찬란]

자동차 안에서 다투다 내린 딸을 엄마가 차로 치어버렸다. 엄마는 차량 급발진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딸은 고의를 주장한다. 엄마가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한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와 딸,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

올초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돼 “두 여성이 탯줄을 자르는 힘든 과정을 예리하게 그렸다”고 평가받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10일 개봉한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 김세인(30)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5관왕(뉴커런츠상·넷팩상·관객상·왓챠상·올해의 배우상), 서울독립영화제 배우부문 독립스타상, 무주산골영화제·서울국제여성영화제(발견부문) 대상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의 작품이다. 정한석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괴력과 완력의 감정적 강도로 관객들을 끌고 가는 영화”라고 표현했다.

법정까지 간 모녀가 서로의 밑바닥을 향해 돌진하는 과정에선 쓴웃음이 터져 나온다. 엄마 막말·구타에 주눅 들어 대인 관계가 서툰 딸 이정(임지호)이 안됐다가도, 동네 단골들의 욕받이를 자처하며 좌욕방을 해 혼자 딸을 키운 엄마 수경(양말복)의 울화통에 공감이 간다.

10대 딸을 둔 홀아비 종열(양흥주)과 재혼을 준비 중인 수경은 직장이 있는데도 자립할 생각은 않고 얹혀사는 이정이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 같아 짜증을 낸다. 아직도 엄마와 속옷을 같이 입을 만큼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이정은 애정 표현은커녕 잘못해도 사과조차 안 하는 엄마가 야속해서 더 삐딱하게 군다.

욕실에서 엄마가 애인과 사랑을 나눈 흔적을 발견한 이정의 보복을 바라보는 관객도 심경이 복잡미묘해진다. 어느 한 사람을 편드는 게 아니라 양쪽의 입장을 고루 생각해보게 하는 게 김세인 감독이 밝힌 연출 의도다.

영화 속 상황은 성인이 돼도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캥거루족’ 자녀가 많아진 요즘 한국사회 현실과도 연결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6월 발간한 보건복지포럼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만 19~49세 성인 남녀 중 미혼자의 64.1%, 비취업자의 43.6%가 부모와 동거하고 있다.

김 감독도 실제 어머니와 같이 살던 2016년 이 이야기를 구상했다. 지난 4일 화상 인터뷰로 만난 김 감독은 “당시 영화감독의 꿈을 엄마가 반대했다. 내 꿈을 선택하는 게 엄마에게 배신이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고 결국 독립하게 됐다”면서 “어릴 적부터 서로 감정적으로 의지하며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그땐 엄마가 잘 이해가 안됐다. 관련 서적을 읽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면서 이게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란 제목은 모녀 간 내밀한 교류를 상징하는 의미로 붙였다. 해외 영화제에선 성인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 ‘한 아파트의 두 여자(The Apartment with Two Women)’란 제목으로 소개했다.

배우들의 존재감도 대단하다. 부산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받은 신예 임지호는 심사를 맡은 엄정화 배우로부터 “천천히 움직이며 켜켜이 쌓아가는 감정선은 관객들을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한다”는 호평을 받았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남선우 프로그래머는 양말복에 대해 “‘어머니라는 존재는 결국 엄마 놀이를 하고 있는 딸일 뿐’이라는 엘레나 페란테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오르게 하는 배우”라고 평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