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태원 참사가 아니라 ‘10·29 핼러윈 참사’다…공감 사회는 ‘이야기’로부터 온다

2022. 11. 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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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청란교회 목사, 동서대학교 석좌교수(가족생태학), 하이패밀리 대표

아들의 결혼식 날, 나는 아들에게 건넬 선물을 고민했다. 그리고 준비한 것은 이야기였다.

부엌에서 음식을 챙기고 있는 엄마에게 여섯 살 난 딸 수지가 묻는다.
“엄마, 뭐해요?”
“네 친구 혜나 엄마가 아파서 가져다 주려고 한다.”
“어디가 아픈데요?”
“응. 가슴이…”
“왜요?”
“얼마 전에 혜나 언니를 교통사고로 잃었단다.”
“아~ 네.”
제 방으로 돌아갔던 수지가 혜나의 집 문을 두드렸다. 혜나 엄마는 수지를 보자마자 울먹이며 묻는다.
“무슨 일로 찾아왔니?”
손에 든 봉투를 내밀며 수지가 말한다. “아줌마, 가슴이 많이 아파요? 이거 붙이면 금방 나을 거예요. 나도 손가락이 아팠는데 이거 붙였더니 금방 나았어요.” 그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이다. 봉투 안에는 ‘일회용 반창고’가 들어 있었다. 혜나 엄마는 수지를 품에 꼬옥 안고 하염없이 운다.
“고맙다, 수지야!”
혜나 엄마는 딸이 생각날 때마다 그 반창고를 보면서 아픈 마음을 달랬다.

나는 이 이야기와 함께 아들에게 반창고 10개를 선물했다. 성직의 길을 걸을 아들에게 누군가에게 ‘반창고’가 되라는 애비의 당부였다. 아들은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생애 최고의 선물이라고 답했다.

대니얼 테일러는 ‘왜 스토리가 중요한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는 사람이 자신과 세상과 현재 처한 곳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한다. 인생을 올바르고 훌륭하게 살기 위해서는 건강한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가 깨지거나 병들었다면 그 이야기를 치유하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줄거리로 대체해야 한다. 이야기는 우리가 과거에 경험한 것을 현재에 강력히 제시하며 미래를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이야기’에 있다. 이야기의 울림이 공감이고 공감이 사회를 결속시킨다. 이번 ‘10·29 핼러윈 참사’만 해도 그렇다. 이런 재난은 수없이 반복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때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우선 명칭부터가 잘못됐다. ‘이태원 참사’와 ‘10·29 핼러윈 참사’는 천양지차다. 정직하게 말해 이태원은 죄가 없다. 이태원이란 ‘공간’에 사건을 묶어두는 순간, 사건은 죽어버린다. 반대로 십이구(10·29)라는 ‘시간’으로 가져가면 기억 장치가 된다. 사건은 살아남아 거울이 되고 나침반이 된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6세기에 나라를 잃었다. 1948년 독립할 때까지 2500년 동안 소위 ‘디아스포라(diaspora)’로 살았다. 떠돌이 유랑민이었다. 그런데도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세계 최고의 불가사의다. 유대인들은 알았다. 시간을 정복하는 자만이 장소를 정복할 수 있음을. 그들은 장소를 통해서가 아니라 안식일이란 시간으로 신(神)을 만났다.

거기다 ‘범인’을 찾아낼 것인가. ‘원인’을 밝힐 것인지에 따라 ‘처벌 사회’로 갈 것인지 ‘치유 사회’로 갈 것인지가 결정된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 154명을 구속시켰다고 안전불감증이 치유된 것이 아니었듯 말이다. 뿐만 아니다. 이번 사태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느냐, 공동체가 나누느냐에 따라 국가의 분열과 결속이 일어난다. 이런 재난은 정쟁의 수단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영구미제의 살인 사건을 공동체의 아픔으로 돌려 결속을 시킨다. 그게 성경의 재난 구조 매뉴얼이다.(신 21:1~9)

한마디로 ‘범인 수사’로 몇 사람 잡아넣고 끝낼 것인지, ‘영웅 서사’로 다음세대에 이야기를 남길 것인지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 재난 현장에도 영웅들이 많았다. 참사 현장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시민들의 발길을 돌려놓았던 김백겸 경사를 비롯한 일선 경찰들이 있었다. 간호사 출신의 파키스탄인 무함마드 샤비르는 심폐소생술로 15~20명을 구했다.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도 소생술 대열에 참여해 인명 피해를 줄였다. 그들도 유대인들이 생명을 구해준 쉰들러처럼 “한 사람을 구하는 사람은 온 세상을 구한다”고 외쳤을 것이다. 가게 문을 닫고 봉사활동에 나선 상인도 있었다. 추모단을 꾸며 슬픔을 같이 나누기도 했다. 시민 모두가 영웅들이었다. 나는 여기서 내 조국의 희망을 읽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이야기’로 자신의 삶을 창조한다. 이래서 언어 연구학자 존 닐(J. Niles)은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이야기하는 인간)라 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이야기하려는 본능이 있고,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이해하는 존재다. 이야기는 죽어가는 사회를 살린다. 나라의 영속성(永續性)을 가져다 준다. 히브리인들이 자녀들에게 들려준 출애굽과 광야의 이야기는 ‘기억(記憶)에 기록한 역사(歷史)’였다. 롤프 옌센은 “정보 사회의 태양은 지고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드림 소사이어티가 곧 온다”고 선언했다. 드림 소사이어티의 공감사회는 이야기와 함께 찾아온다. 이야기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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