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최측 없는 매뉴얼은 없다"…존재이유 망각한 경찰의 항변 [현장에서]

이창훈 2022. 11. 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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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경찰은 당장의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행사에 내재되는 위험성을 사전 판단하고, 필요시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등 행사 안전 확보에 힘써야 합니다.”

본격 핼러윈 시즌을 하루 앞둔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세계음식거리에는 ‘Wear your mask to keep us all safe’(우리 모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김지혜 기자


2014년 8월 경찰청에서 발간한 ‘다중운집 행사 안전관리 매뉴얼’의 발간사 중 일부다. 이태원 참사 발생 후 경찰은 다중 운집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의 존재 여부를 캐물을 때마다 “주최 측이 없는 인파 사건에 대응하는 매뉴얼은 없다”(지난달 31일 브리핑 등)고 반응했다. 그러다 지난 3일 임호선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실을 통해 문제의 매뉴얼이 2005년에 작성돼 2014년 8월에 최종 개정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은 다시 “해당 매뉴얼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과 ‘공연법’이 법적 근거여서 모두 주최자가 있는 경우를 전제한 것”이라는 입장을 반복했다.

그러나 막상 매뉴얼에는 주최가 있건 없건 군중 운집행사 관리에 참고할 만한 내용들이 적잖게 담겨 있다. 예시로 담긴 2014년 6월 서울 광화문광장과 영동대로에서 열린 브라질 월드컵 길거리 응원전 대응 계획이 대표적이다. 경찰은 다중 운집에 따른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지하철역 출구·에스컬레이터 안전 관리 ▶차선 축소 계획 ▶해산 시 응원 인파 유도 방안 등을 준비했었다. 월드컵 길거리 응원전 역시 주최 측의 통제를 넘는 군중들의 흐름과 행동이 빈발하는 현장이다. 과거 핼러윈 기간 지하철 승하차 통계 등을 토대로 이번 핼러윈 주말 대규모 인파 운집을 예측했던 경찰이 충분히 참고할 만한 내용이다.

지난 2002년 6월에 열린 2002월드컵 D조 한국과 포르투갈전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시청앞 광장에 모인 거리 응원단이 한국팀의 승리를 기원하며 열띤 응원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다중운집 행사 안전관리 매뉴얼은 탄생 자체가 18년 전 발생한 압사 사고에서 비롯됐다. 경찰은 2004년 10월 경북 상주시민운동장에서 열린 공연 입장 중 11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발행하자 그다음 해 ‘수익성 행사 관리 매뉴얼’을 만들었다. 민간 주도의 행사라도 안전 관리에 공권력이 개입할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해당 매뉴얼은 2006년 ‘혼잡경비 실무 매뉴얼’로 개정되면서 민간이 주최하는 체육 경기·콘서트 같은 수익성 행사뿐만 아니라 군중이 모일 수 있는 각종 축제로도 안전 관리의 대상을 확대했다. 2014년 4월 세월호 사고 이후 제정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과 지역 축제 안전관리 매뉴얼 등을 반영해 한 차례 더 개정됐다.

2005년과 2014년 매뉴얼 작성 업무에 참여했던 경찰관 A씨는 이태원 참사에 대해 “혼잡 경비 업무를 오래 맡아왔지만, 상상할 수 없었던 사고”라고 말했다. A씨는 “이 정도로 예견된 혼잡이었다면 당연히 개입했을 텐데, 행사 주최도 없고 압사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일반적인 관념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매뉴얼의 뼈대가 주최측과 경찰의 협력을 전제로 구성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용산경찰서는 2020년에 작성한 ‘핼러윈 데이 종합치안대책’에선 인구 밀집으로 인한 압사 및 추락 등 안전사고 대비를 점검 요소로 꼽았지만 올해 치안대책에서는 군중 밀집에 따른 위험에 대한 대비는 빠져있었다. 대신 마약 등 범죄 예방과 교통질서 관리, 과다 노출 단속 등을 중점 대응 사안으로 꼽았다.

경찰청이 2014년 8월 발간한 다중운집 행사 안전관리 매뉴얼의 표지. 경찰청


참사 후 정부가 내놓은 대책의 핵심은 주최 측이 없는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군중들의 일시적인 심리와 분위기 인파의 흐름을 우발적으로 결정하는 군중 운집 행사에서 따라하기만 하면 되는 매뉴얼이란 있을 수 없다. 세계 각국의 매뉴얼도 위험성 판단 기준과 원칙들을 제시한 뒤 경찰에게 광범위한 안전관리의 책임과 재량권을 부여한다. 어떤 매뉴얼에는 다양한 과거 사례가 제시돼 있을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2014년의 매뉴얼은 군중 운집 상황을 예견한 경찰에게 충분하지는 않지만 요긴한 참고서였다. 경찰은 참사 발생 이후에도 마땅히 해야될 일을 성문화된 법 개념에서만 찾는 경직된 집단 사고에 빠져 국민들의 생명보호라는 존재 이유를 등졌다는 사실을 연일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만약에 대비하는 것이 매뉴얼이지만, ‘매뉴얼이 없었다’, ‘주최자가 없는 행사라 적용할 수 없었다’는 경찰의 해명은 매뉴얼을 만든 취지를 다시 묻게 된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재난에 대비하겠다는 자세가 없다면 새로 나올 어떤 매뉴얼도 또 무용지물이 될 공산이 크다.

이창훈 기자 lee.changho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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