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겪은 홍콩과 일본이 지목한 원인, 밀집과 정체
[류승연 기자]
하룻밤 새 150여명이 목숨을 잃어 '세월호 이후 최대 사고'가 된 이태원 압사 참사. 고의로 밀었다는 얘기도 있고, 유명인사 방문으로 인파가 쏠렸다는 주장도 있지만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 비슷한 일은 외국에서도 있었는데, 참사 원인으로 지목한 건 '밀집'과 '정체'다.
압사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각국의 안전 시스템을 만드는 데 뿌리가 된 두 개의 보고서가 있다. 홍콩 당국이 보카리 판사에게 진상 조사를 요구해 나오게 된 '최종 보카리 보고서(The Final Bokhary Report)와 일본 아카시시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는 '제32회 아카시 시민 여름 축제 불꽃놀이 사고 조사 보고서(第32回明石市民夏まつりにおける花火大会事故調査報告書)'가 그것이다.
▲ 1993년 2월 발표된 '마지막 보카리 보고서(The Final Bokhary Report)'에 포함돼 있는 그림. 빨간색으로 표시된 장소가 압사 사고가 벌어진 장소다. |
ⓒ The Final Bokhary Report |
지난 1993년 1월 1일, 새해 전야제를 맞아 홍콩의 이태원, 란콰이퐁(Lan Kwai Fong) 도로엔 약 2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그중 한 도로의 구석엔 콘서트를 위한 작은 무대도 설치됐고 주변엔 공연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새해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자 길 한복판에서 샴페인을 터트린 이들도 적지 않았다. 도로가 평소보다 미끄러웠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이들 골목길은 경사도 있었다.
카운트다운이 끝난 뒤 사람들은 원하는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사실상 그 지역의 '통로' 역할을 하던 다아길라르(D'Aguilar)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자 도미노처럼 미끄러지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이어진 참사로 21명이 사망하고 63명이 다쳤다.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참사였다. 하지만 보카리 판사는 그중에서도 '인구 과밀'을 사고 발생 요인으로 짚었다. 애초에 한 장소에 많은 사람이 몰리는 환경이 조성된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이야기다.
그는 보고서에서 "사람이 너무 붐비지 않았다면 연쇄적인 추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동시에 넘어진 인원 수는 그 순간의 인구 밀도를 반영한다. 인구 밀도 자체가 (사고 발생) 가능성을 높이고 사람에게 치명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건은 이 사실을 보여준, 너무나 잔인한 사례"라고 언급했다.
결국 보카리 판사는 "경찰관이 특정 지역에서 사람들 사이를 효과적으로 순찰할 수 없다면 그 지역은 위험할 정도로 붐비는 지역으로 여겨져야 한다"며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해 군중 크기 자체를 통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보카리 판사가 지적한 문제들은 실제 홍콩 경찰의 현장 통제로 이어졌다. 주요 장소에 출입할 수 있는 인원수 자체를 통제하는 것이다.
"페스티벌에 참가하면서 놀라웠던 건 입구랑 출구 앞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아무 곳이나 들어갈 수 없고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② 인구 정체 막자...일본에 'DJ 폴리스'가 생겨난 이유
▲ 지난 2001년 7월 21일 압사 사고가 발생했던 일본 '아카시 시민 여름 축제 불꽃놀이' 당일 오후 6시50분경 촬영된 사진. 참사는 그로부터 2시간 후인 8시 40~50분경 발생했다. |
ⓒ AKASHI CITY |
홍콩 사례뿐 아니다. 지난 2001년 7월 21일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에서 발생했던 압사 참사를 분석한 사고조사위원회 역시 보고서에서 비슷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 일본 아카시 시가 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는 '제32회 아카시 시민 여름 축제에 있어서의 불꽃놀이 사고 조사 보고서'의 '제2부 기술 해석'에서 안내되고 있는 혼잡 상태와 군중 밀도의 관계 |
ⓒ AKASHI CITY |
위원회는 1㎡ 당 밀집한 인원에 따라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강도를 분석했다. 1㎡당 3~5명일 때 정상적인 보행이 가능하지면, 그 수가 12명 전후로 늘어날 경우 앞 뒤 사람의 몸에 눌려 움직이지 못하고 13명 이상이 되면 극도의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위원회는 인구 밀도를 높힌 직접적인 이유였던 병목현상에 주목했다. 해당 보고서에서 위원회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행사장으로 가려했던 이들에겐 이 육교를 이용한 경로가 '지름길'인 데다 원래 이 육교에는 병목현상이 있어, 사전 통제 없이 무제한으로 사람들을 유입하도록 하면 정체를 일으키기 쉬운 구간"이라며 "이 육교는 불꽃놀이를 보기도 좋은 장소라, 정체가 발생하기 쉽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주최자측과 경찰서측, 경비 회사측 3자는 이 같은 상황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고 사전에 합의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홍콩 사례가 인구 밀도 자체를 줄이자는 결론을 내린 것과는 달리, 일본 사례에선 인구 정체 해소를 사고 재발 방지의 해법으로 제시한 셈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 따라 매년 헬러윈 파티가 벌어지는 도쿄 시부야에서는 'DJ 폴리스'라고 불리는 경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도로 한복판에 높게 설치된 감시탑 위에 선 경찰들은 "한 자리에 멈추지 말고 계속 이동해 주시기 바란다"고 지속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③ 홍콩·일본은 왜 '일방통행'에 집착할까?
한편 이태원 압사 참사 후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되고 있는 홍콩·일본의 핼러윈 데이 현장 기사를 살펴보면 유독 '일방통행'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띈다. 실제 지난 31일 핼러원 데이 때 일본은 시부야역 근처 차량 운행을 전면 통제하고 나머지 도로는 일방통행으로 전환했다. 홍콩 역시 사람들이 한쪽 방향으로만 이동할 수 있게 줄을 세웠다.
두 나라 모두,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려는 인파가 한 도로에 몰려 있을 경우 사람이 도미노처럼 넘어지기 쉽다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실제 일본 사고조사위원회는 당시를 회고하며 "불꽃놀이가 끝나기 전부터 육교로 향하는 계단이나 육교 위에서 불꽃놀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역으로 돌아가려는 듯한 흐름이 만들어졌고 이 흐름이 역에서 행사장으로 가려는 또다른 흐름과 충돌했다"며 "'대항류'가 생기고 교착하는 과정이 얼마간 계속된 이후에 (사람이 도미노처럼 넘어지는) 군중 눈사태가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위원회는 또 "현장에 있던 시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려는 군중 속에서 사람들의 몸이 5번 정도 오른쪽·왼쪽으로 휘청이며 강한 압력을 견딘 것으로 확인됐다"며 "많은 사람들의 무게가 더해지기 때문에 이 압력은 점차 더 심해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가 군중 눈사태였다는 증언이 있다"고 적었다.
홍콩 사례의 보카리 판사 역시 인구 밀도가 높은 장소에서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려 할 때 유독 위험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조류 시스템(한 방향으로 통행)'을 도입하라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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