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교묘한 연출, 유난히 돋보인 영화

[넘버링 무비 237] 영화 <탑>

[조영준 기자]

▲ 영화 <탑> 메인포스터 ⓒ (주)영화제작전원사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중년의 영화감독 병수(권해효 분)는 딸 정수(박미소 분)와 함께 인테리어 디자이너 해옥(이혜영 분)의 건물을 찾는다. 미술을 그만두고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우고 싶어 하는 딸을 소개하고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해옥의 소개로 비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진 건물을 구경한다. 4층 건물을 매입해서 직접 고쳤다는 디자이너의 소개로 병수와 정수는 2층에 있는 원 테이블 식당에서부터 옥탑까지 건물 곳곳을 소개받는다. 각층의 방을 모두 구경한 끝에 지하 작업실에서 다시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 갑작스럽게 걸려온 영화사 대표의 전화를 받고 감독이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 어색하게 남게 된 두 사람만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언제부터였을까? 홍상수 감독이 영화에서 조금씩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극의 형식보다는 이야기와 대화에 중심을 두고 있던 그의 영화가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들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는 느낌. 지난 작품 <소설가의 영화> 마지막에 등장했던 장면이 그랬고, 그의 또 다른 영화 <인트로덕션>에서 제목 그대로 서문의 형식을 활용하던 아이디어가 그랬다. 원래의 무게 중심을 버리고 새로운 중심을 찾아간다는 느낌은 아니다. 이전까지의 작품들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던 인물과 대화의 결은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조금 더 색다르게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표현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하나 둘 시도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의 스물여덟 번째 영화 <탑> 역시 동일한 맥락 위에 놓여있다. 영화 속 모든 상황을 오직 한 건물에서만 진행하는 방식은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한 번도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이다. 물론 <북촌방향>(2011)이나 <풀잎들>(2018), <강변호텔>(2019)처럼 특정한 장소나 공간을 매개로 이어지던 이야기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 속에 구조화되어 있는 이야기들이 서로를 이어 내기 위함이 아니라 마치 이 건물의 물리적 공간을 대신해 설명이라도 하는 듯 스토리 상의 연결점이 없이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 극 중 인물들이 이 '탑'처럼 보이는 건물을 완전히 벗어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는 분명한 차이점을 보인다.

02.
영화는 구조적으로 건물의 형태를 따라 상승하는 방식으로 극을 완성해내고 있다. 굳이 전작의 이름을 빌리자면, '인트로덕션'(서문)에 해당하는 영화의 첫 지점에서는 1층 식당을 시작으로 옥탑까지 설명하는 과정이 보인다. 이 건물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지 관객에게 주입하는 단계이며, 각각의 공간이 어떤 형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이미지화시키는 작업이다. 일종의 요약(summary)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이 과정 이후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지하와 2층, 3층 그리고 옥탑의 순서로 탑의 정방향대로 걸어 올라가듯이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1층에서의 이야기는 이미 시작과 함께 다뤄졌기 때문에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극 중 이야기가 영화에 놓인 물성의 형태를 따라 차례로 쌓이고 있는 구조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숨을 죽인 채 모습을 감추고 있다. 적어도 지하에서 이루어지는 정수와 해옥의 이야기와 2층에서 만들어지는 선희(송선미 분)와의 만남, 3층에 놓여 있는 병수와 선희의 내러티브까지는 영화의 스토리 라인 자체도 큰 이질감 없이 자연스러운 연결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층간을 의미하는 블랭크 지점에서 갑작스러운 시차가 벌어지기는 하지만 충분히 이해 가능한 편집이다.) 문제는 영화의 위치가 4층에 다다르게 되면서부터다. 이 지점에서부터 영화가 이야기의 연결고리보다 이야기를 활용한 물성의 구조화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고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병수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영화는 명백하게 자신의 목적이 이 탑을 세우는 데 있었음을 고백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덩어리, 각각의 이야기가 서로 제대로 상응하며 하나의 커다란 서사를 이룰 것이라고 믿는 것은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관습에 의한 기대나 바람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영화가 하나의 서사를 갖고 있는 극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에 하나의 영화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보여주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그 이야기를 어떻게든 이어 붙이고자 노력한다. 이 영화 <탑>을 하나의 서사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 역시 여기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분절된 영화 속 이야기들이 서로 이질적이게 느껴질 정도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연결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서로의 이야기가 마주 보고 있는 듯하면서도 다른 이상을 향하는, 어떤 경계 위에서 이루어지는 홍상수 감독의 교묘한 연출과 편집은 이번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 영화 <탑> 스틸컷 ⓒ (주)영화제작전원사

03.
하나의 탑을 상징하는 해옥의 건물과 이 건물을 둘러싼 주변 환경은 유난히 비좁고 복잡하다. 심지어 유일하게 탑을 벗어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병수의 차가 멀어지는 장면에서도 양쪽으로 가로막힌 공사장의 가림막 패널이 카메라의 시야를 제한한다. 영화 속 그 어떤 장면에서도 배경이 환하게 트여 있거나 시선의 좌우가 자유롭게 넓은 신을 만날 수 없다. 여기에 탑을 오르내리는 장면이나 발코니에 오른 인물을 바라보는 앵글조차 인물과 수평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보니 이를 반영하는 프레임과 그 프레임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에서는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한 작품의 러닝 타임 전체가 이 정도로 제한되는 경우는 만나보기 쉽지 않다. 여기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영화 속에 구현되는 캐릭터들, 인물이 그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가족과 떨어진 지 10년이 넘은 병수는 혼자 사는 게 편하다고 하면서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는 인물이다. 이름이 알려진 감독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투자를 받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다. 딸과의 관계도 그리 가까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2층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선희도 마찬가지다. 이혼을 한 지 3년, 오랜 꿈이었던 미술을 등지고 먹고살기 위해 원 테이블 식당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 역시 쉽지 않다. 누군가의 곁에 정착하는 일도 마찬가지. 감독의 딸인 정수도, 잘 나가는 디자이너 해옥도, 1층 식당에서 일하는 쥴(신석호 분)도 모두 어딘지 모르게 답답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의 시선, 프레임의 구조가 모두의 심리를 일부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내면의 시각화 또는 스크린 너머로 시도하는 감정의 전이다.

04.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이야기를 활용한 극과 물성의 구조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영화만이 갖고 있는 특징적인 부분이기에 시선을 둔 것이지 작품의 전부는 결코 아니다. 이 글의 처음에서 '이전까지의 작품들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던 인물과 대화의 결은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라는 표현을 쓴 것처럼 영화는 대화를 통해 말을 거는 홍상수 감독 특유의 장기도 그대로 반영한다. 지하 작업실에서 이루어지는 혜영과 미소의 대화를 통해서는 어떤 부분만 놓고 한 사람의 전부라고 볼 수 없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병수가 영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여자를 가까이 하기 시작하고 집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며 대중이 생각하는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다르다는 미소. 이에 혜영은 가정에서 보이는 모습도 가정 밖에서 보이는 모습도 모두 그 사람이 가진 면모라고 반박하며 하나의 화두를 이끌어낸다.

영화 일을 하면서 자신의 의지대로 작업을 이어가기 힘든 산업적 면모와 자본의 논리에 휘감긴 영화의 속성에 대해 성토하는 병수와 좋아했지만 계속 이어갈 수 없었던 미술에 대해 말하는 선희의 대화 속에서는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 예술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일에 대한 시선이 던져진다. 감독의 전작 <인트로덕션>에서 영호(신석호 분)가 영화배우(기주봉 분)를 만나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던 장면과 결을 함께 하는 화제다. 이렇게 작품 사이에서도 반복되며 던져지는 화제는 어쩌면 실재하는 감독 본인이 오랜 경험들 끝에 느끼고 있는 지점의 이야기를 극 중 인물로 하여금 대변하게 만드는 부분인 것 같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영화 속 어떤 대화들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감독 자신이 직접 투영된 것처럼 느껴지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 영화 <탑> 스틸컷 ⓒ (주)영화제작전원사

05.
결국 모든 것은 균형에 있다. 기존의 용법과 새로운 시도의 균형이 이 영화 <탑>의 완성도를 좌우한다면, 적어도 이 탑의 균형은 안정적이라고 하겠다. 두 지점의 반영이 적절한 비율로 섞여 있어서만은 아니다. 생각보다 촘촘하게 짜인 이 영화는 각각의 이야기를 보이지 않게 서로 붙들고 있는 연결 고리까지도 곳곳에 이어져 있다. 해옥이 잘 나가는 사람들을 좋아한다던 쥴의 말이 이전의 장면에서 유명 감독에게 층을 공짜로 내어주겠다던 모습과 이제 세입자가 된 3층의 병수를 하대하는 모습으로 대비되어 연결되는 식이다. 아빠가 겁이 많다던 정수의 말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테라스에 나와 난간을 흔들며 확인하는 행동으로 시각화되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 여자를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는 병수는 러닝 타임 내내 여성의 곁에서만 맴돈다. 이야기와 이야기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영화의 마지막, 탑의 1층으로 내려온 영화감독의 뒷모습은 어쩐지 개운하지가 않다. 해옥과의 술자리를 이어가기 위해 와인을 사러 편의점에 다녀오던 딸 정수와 만나게 되는 일 정도는 이제 가볍게 넘겨버리자. 그 일이 아니더라도 이 탑을 오르내리는 동안 얼마의 시간이 지나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영화가 보여주는 대담함만큼이나 관객들도 대담한 시선을 가져야만 한다. 미지의 탑을 모두 탐험한 이름 모를 용사의 모습만큼이나 처연한 병수의 모습은 웃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그늘져 보인다. 생각해 보면 영화 속 모든 장면, 병수가 담배를 피우던 장면에는 헛헛한 감정이 맴돌았다. 그리고 지금, 병수는 다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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