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내의 부활, 그 남자의 뒤늦은 깨달음
[윤일희 기자]
TVING 드라마 <욘더>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드라마다. 시간적 배경이 2032년이라는 임박한 미래인데, 불과 10년 후의 삶이라고 받아들이기엔 기술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급격히 변화된 상황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안락사와 망자의 기억을 데이터로 축적한 AI가 산자의 삶에 개입한다는 엄청난 설정이 그것인데, 두 가지 의제 모두 시청자를 혼돈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안락사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법체계 안에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 고령화 사회와 수명 연장은 의료비의 가파른 상승 앞에 무릎 꿇고, 존엄한 죽음이라는 숭고한 외피를 두르고 나타나 '그만 떠나라'고 재촉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드라마 시작부터 주인공 이후(한지민)의 안락사가 신속하고 평온하게 진행되는 장면은 충격적이긴 하나, 우리의 미래로 (2032년은 좀 빠르지만) 걸어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근 미래로 제시한 '삶으로의 이행을 멈추지 않는 죽음'이라는 화두는 꽤나 충격적이고 논쟁적이다. 망자들이 기억을 저장하는 마이크로 칩 브로핀을 이용해 산 자의 곁으로 컴백한다는 것인데, 이후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재현(신하균)에게 나타난다. 이후의 이메일 계정을 통해 송신된 영상 메일은 TV 스크린으로 연동되어 생전의 아프지 않은 모습으로 "여보 나 여기 있어"하고 부르고 있다. 만약 우리의 죽은 가족 누군가가 우리의 동의를 생략한 채 우리의 삶으로 불쑥 틈입해 '나 여기 있어' 한다면, 이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가 그저 반갑기만 할 수 있을까?
▲ TVING 드라마 <욘더> 한 장면. |
ⓒ 티빙 |
SF 작가 김초엽의 소설 <관내분실>은 드라마와 비슷한 설정을 담고 있다. 소설에서 망자의 기억은 '마인드 업로딩'으로 컴퓨터에 저장되어 도서관에 보관된다. 망자를 만나고 싶으면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듯 '마인드 업로딩'으로 만날 수 있다.
이는 중개소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산자에게 접촉하는 <욘더>의 경우와 다른 점인데, 산 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망자의 현신이라 여겨지는 무언가를 만나지 않을 수 있다. 이 점, 망자가 무시로 현세에 출몰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안전장치 때문에 독자는 조금 안심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진보한 기술로 망자가 현세에 시시때때로 출현하는 <욘더>의 무엇은 시청자를 당황하게 한다. 지금껏 죽음을 소멸로 여겨온 인류에게 죽어도 스러지지 않는 존재가 나타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붕괴시키고 있으니, 불편하지 않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김초엽 소설의 '마인드 업로딩'과는 다르지만, 몇 해 전 엠넷 < AI 음악 프로젝트 다시 한번 >에서 영면한 뮤지션들을 AI 기술로 재현한 일이 있었다. 고 김현식이 홀로그램으로 무대에 재현되었는데 무척 기이한 느낌이었다. 아직도 겨울이면 그의 노래를 애청하는 팬으로서 그의 홀로그램 재현이 반가울 법도 했지만, 내 감정은 사뭇 복잡해졌다. 게다 객석에 초대된 그의 동생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죽은 형의 홀로그램 재현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더 혼란스러워졌다.
AI가 만들어낸 목소리는 고 김현식의 목소리와 거의 흡사했고, 홀로그램도 분명 서걱댔지만 그의 형상이긴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김현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면한 그를 왜 저토록 어색한 모습으로 낯선 무대에 등장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하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내 감상은 '이건 아닌데...'였지만, 그의 가족인 동생이 보인 눈물의 감동은 '너는 가족이 아니어서 그래'라며 내 혼란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럴까. 가족이면 어떤 형태로든 죽은 사람의 형상이 기려지고 기억되는 것을 바라게 될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동생뿐 아니라 지켜보는 우리 모두 무대에 어색하게 서서 노래하는 그가 김현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남겨진 우리는 죽은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이 기괴한 망자의 재현에는 그리움이 깊게 자리하고 있겠지만, 망자가 자신이 저리 재현되는 것을 원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이 경우 망자의 소환은 분명 산자의 욕망이었다.
▲ TVING 드라마 <욘더> 한 장면. |
ⓒ 티빙 |
반면 <욘더>의 경우는 죽은 자의 욕망이 크게 반영되고 있다. 행복했던 이후에게 갑자기 신장 암 말기 선고가 내려지고 게다 아이까지 임신하고 있었으니 그 비통함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의 비통은 브로핀이라는 칩을 경유해 소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죽음으로 나타났다. 이후는 '욘더'라는 망자들이 거하는 세상으로 옮아가 남편이 이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망자의 욕망이 산 사람을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세상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욘더'에서 망자의 아바타는 '죽어서 어서 내게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메타버스 공간에서 이후를 만난 재현은 혼란스럽다. 이후가 아니지만 이후이기도 한 죽은 아내의 아바타를 만나고 보니, 욘더로 떠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갈등한다. 마침내 재현은 브로핀을 이용해 욘더로 떠난다. 그 유토피아에는 더는 아프지 않은 이후와 그가 미처 만나보지 못한 아기가 있다. 다시 단란한 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는 오래지 않아 아기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다. 욘더에서 행복한 삶이 이어질 거라 기대했지만, 욘더의 삶은 성장이 멈춘 삶의 도돌이표였다. "영원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욘더의 대의는 매일을 똑같이 반복해 살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메타버스 속 아바타인 변종 인격체는 변하지 않는 매일을 무한 반복하는 권태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일까?
미처 태어나지 못하고 함께 죽은 아이에 대한 비통함이 모자의 부활이라는 욕망으로 이행됐지만, 이후는 그 아이가 "변하지 않는" 즉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존재임을 직면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아이와의 부활이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에 있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은 그의 선택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성찰하게 한다.
재현은 이후와 욘더에서의 두 번째 이별을 통해 각성한다. 산 사람을 죽음으로 불러들여 결국 무한 반복되는 욘더의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더 이상 유토피아일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는 욘더의 아바타들이 끊임없이 불러대는 세이렌의 장송곡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욕망은 참으로 질긴 것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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