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유발법, 기막히게 잘 알았던 피카소
이번 호부터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의 ‘그림으로 읽는 유혹의 기술’을 연재합니다. ‘글 잘 쓰고 강의 잘하는 미술 평론가’로 이름을 날린 유경희 대표는 그림 한 편에 오롯이 담겨 있는 유혹의 코드와 그 유혹의 코드 안에 숨겨진 다양한 뒷얘기를 들려줄 예정입니다.
유년 시절 피카소는 여자들 틈바구니에 살았다. 어머니, 할머니, 네 명의 이모, 사촌 그리고 두 명의 누이 등 여성들에게 떠받들 듯이 키워진 탓에 성격이 모난 아이로 자랐다. 피카소는 타고난 강인함을 지닌 어머니와 평생 사이가 좋았는데 결국에는 아버지의 성이 아닌 어머니의 성 피카소로 서명함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아버지 호세 루이즈는 화가였지만 지방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평범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드로잉을 가르치다 자신의 재능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들에게 자신의 화구를 모두 남겨주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처럼 피카소는 집안 모든 사람이 피카소만을 배려했던 환경 속에서 자랐다.
스페인 말라가 출신 피카소는 스무 살도 채 안 된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파리에 눌러앉았다. 당시 코즈모폴리턴적인 도시 파리는 진보를 대표했고, 피카소는 거기서 자신의 몫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피카소는 그렇게 대도시 파리에서 프랑스어를 잘할 줄 모르는 이민자, 즉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허드렛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예술 하나로 승부해 성공하는 것이었다.
유난히 자존심 강했던 피카소는 다른 화가들처럼 우스꽝스러운 삽화를 그려 잡지사에 보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고통스럽지만 참고 기다렸다. 그러기 위해 누구를 자기 작업에 끌어들여야 할지, 어떻게 하면 자기 작품을 잘 팔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유명해질 수 있는지를 늘 살피고 다녔다.
그런 그가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 예술가들 사이에서 제왕처럼 군림하게 됐다.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바로 피카소의 가스라이팅 덕분이다. 우선 그는 자기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를 찾았고, 그들이 서로를 질투하며 자신의 최측근 자리를 두고 다투게 만들었다. 피카소는 항상 자신의 오른팔 노릇 할 사람을 암묵적으로 지정했다. 그리하여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앙드레 살몽은 피카소가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에게 부여하는 최측근의 자리를 항상 부러워했다.
여기에서 가장 불행했던 한 사람, 즉 가스라이팅 최적의 희생자는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막스 자코브(Max Jacob, 1876~1944년)였다. 가난했던 몽마르트르 시절, 두 사람은 한때 동거를 했을 만큼 서로 사랑하고 격려했던 사이다. 우정인 듯, 애정인 듯, 묘한 감정에 휩싸인 막스는 피카소에게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와 같은 문학의 세계를 발견하도록 해줬을 뿐 아니라 상류 사회와 교류할 수 있게 해줬다. 특히 막스는 원고료를 받으면 몽땅 피카소에게 갖다 바쳤다.
당시 미술계는 피카소의 청색 시대 그림을 외면했다. 피카소의 청색 시대란 피카소가 몽마르트르에 사는 스페인 이민자 사회의 비참함을 그리던 시절을 말한다. 그때 막스는 무명 화가 피카소를 지원하기 위해 막심 페뷔르라는 이름의 부유한 미술품 소장가 행세를 하며 화랑을 돌아다녔다. “피카소 작품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마치 떠오르는 신예를 어떻게 모를 수 있냐고 항변하듯. 그런데 훗날 피카소는 그를 냉혹하게 배신했다. 막스가 나치 독일에 체포됐을 때 구명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피카소의 개입을 권유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피카소는 언제나 그렇듯 마치 연인처럼 막스 자코브를 좋아하다 버렸고, 또 다른 시인 앙드레 살몽 또한 열정적으로 좋아하다 멀리했다. 이후 그는 기욤 아폴리네르를 사랑했지만 배신했고 다시 장 콕토로 갈아탔다.
피카소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주변 예술가들은 일시적으로 자신에게 집중돼 쏟아졌던 피카소의 애정과 관심이 사라지는 것을 괴로워하며 아주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럼에도 피카소는 그들 가운데서 늘 황제처럼 군림하며 유유자적하는 행보를 계속했다.
이방인 피카소가 어떻게 친구들 사이에서 우상 노릇을 할 수 있었을까?
이방인으로서 피카소는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를 교활하리만큼 아주 명확하게 파악했다. 누군가를 조롱할 기회가 생기면 절친이라도 심술궂은 말을 해댔다. 피카소의 이런 기질과 성격을 융 심리학의 집단무의식 원형 개념 중 트릭스터(trickster·협잡꾼, 사기꾼, 선동가)라고 부른다. 트릭스터는 인간 내면의 반항적 에너지로 기존 체제를 거부하거나 의문시하고, 도덕과 관습을 무시하는 등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를 가리킨다. 아주 잘 돌아가는 체제에 반동을 걸고, 승리감에 차 있을 때도 조소를 보내며, 미래의 재난을 예언하기를 즐긴다. 때로 트릭스터의 행동은 긍정적 결과로 나타날 때도 많다. 기존 체제에서 벗어난 행동은 영웅처럼 변혁과 지혜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단순한 악당이나 선동가가 아닌, 예술가와 혁명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좋은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는 유명한 아포리즘은 그가 전형적인 트릭스터형 예술가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미술사의 저명한 작품을 인용하고 참고는 하되, 모방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겠다는 신념의 표현인 것이다. 피카소가 장물아비를 통해 고대 이베리아 반도 조각품이나 아프리카 가면 같은 고미술품을 도굴하거나 사들이고도 죄의식이 별로 없었던 것 또한 그의 트릭스터 성향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피카소는 자신의 도둑질이 새로운 미의 패러다임을 창조하기 위한 통과 의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에는 가당치 않을 피카소와 동료들의 조화로운 공모 관계(?)는 예술에서 혁명이 일어났던, 가난하지만 아름다웠던 시절에만 가능했던 일은 아닐까? 그러니까 사랑과 우정이라는 연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권위와 태도와 돈과 밥을 양보할 줄 알았던 시대였기 때문이 아닐까?
갑자기 피카소보다 기꺼이 가스라이팅의 대상이 돼줬던 존재들이 더 그립다. 그 존재들이야말로 알면서 속아주는, 어쩌면 더 높은 차원의 지성적이고 영적인 존재들이라고 본다면 지나친 말일까?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82호 (2022.11.02~2022.11.0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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