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지 표시까지 살피는 '예민맘', 돌이킬 수 없다

박솔희 2022. 11. 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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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솔희 기자]

달걀을 살 때는 뚜껑을 살짝 열어 난각번호를 확인한다. 난각번호는 달걀을 낳은 닭의 생육환경을 나타낸다. 끝자리 숫자가 클수록 환경이 열악하다. 끝자리가 4인 것은 좁은 케이지에 갇혀 사는 닭이 낳은 것이다. 사지 않는다. 끝자리가 1인 게 가장 좋지만 흔치 않아서 보통은 2로 만족한다.

유기농 우유는 비싸서 무항생제 우유를 배달시키고 있었는데, 그나마 중단했다. 아이를 위해 호주산 A2 우유를 주문하면서 우리 부부도 그것만 먹고 있다. 방목해 기르는 소에서 생산되는 A2 단백질이 함유된 고급 우유다. 소에 투여되는 각종 성장촉진제와 항생제는 우유를 먹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기에 아무 거나 먹일 수 없다.

아이가 6개월이 되어 이유식을 시작하자 식재료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됐다. 탄단지 균형, 초록채소와 노란채소를 골고루, 과일은 적당량만... 이유식을 챙기면서 덩달아 우리 부부가 먹는 음식에도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매월 배달 앱 VIP를 갱신하며 되는 대로 먹고 살던 우리 부부에게 큰 변화였다.
 
 달걀을 살 때는 난각번호를 확인해 본다.
ⓒ Jakub Kapusnak, Unsplash
 
살면서 먹는 일에 이렇게 관심을 가진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원래 마른 체질이라 별다른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고, 먹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술과 미식을 즐기는 남편을 만난 뒤 연애 때부터 임신 직전까지 10kg가 쪘을 정도다.

먹는 음식에 조금씩 신경을 쓰기 시작한 건 임신 때부터였다. 뱃속에 아기가 있으니 아무 거나 먹을 수가 없었다. 술과 치즈, 참치 등 먹지 말라는 건 조심했지만, 건강한 식생활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당시 우리 부부는 짜장면 배달조차 안 되는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임신을 하니 입덧으로 주방 근처에 가지도 못했고 차멀미가 심해져 외식도 무리였다.

그래서 자주 먹은 게 컵밥 같은 즉석식품이었다. 조그만 동네 마트에는 질 좋은 신선식품이나 밀키트 같은 게 없었고, '쓱' 오는 마트 배송도 되지 않는 지역이었다. 택배 주문은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신선도가 떨어져 별 수 없이 장을 보러 가면 사 오는게 컵밥과 냉동식품이었다.

임신하고 처음 해본 식단 관리

임산부가 그래서는 안 되었다. 나트륨과 당 비중이 높은 간편식품을 자주 먹으니 급속도로 살이 쪘다. 임신을 하면 체중이 늘어나는 건 자연스럽지만 내가 먹는 양에 비해서 살이 빠르게 찌고 있었고, 뱃속의 아이도 원래 주수 대비 2~4주 가량 큰 편이었다. 아이가 너무 크면 자연분만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식이 조절이 필요하다고, 의사 선생님도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때부터 식품 라벨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라면 봉지 뒷면의 성분표를 읽어보면 라면 한 봉지로 성인에게 하루 필요한 나트륨의 80% 가량을 섭취하게 된다고 한다. 컵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자나 치킨을 먹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들이키는 탄산음료도 당 함량이 지나치게 높았다.

여름 과일이 당겨서 많이 먹었더니 또 아기가 너무 커져서 임신 후기에는 타이트한 식단 관리를 하기도 했다. 과일을 너무 많이 먹어도 당 섭취가 과다해 좋지 않다는 걸 그때 알았다. 백미밥과 밀가루, 과일을 끊고 현미밥에 고기, 채소만 먹었다. 임신 37주에 양수가 터져서 새벽 2시에 병원에 가면서, 이제 식단 관리 안 해도 된다며 신이 나서 떡볶이와 컵라면을 사서 입원했던 기억이 있다.

건강식에 집착하는 '예민맘'이 되다

그냥 '유기농'이면 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나는 단기간에 식품영양에 대한 지식을 엄청나게 쌓았다. 마음만 먹으면 정보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세상. 영양학과 생물학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며 아이에게 무얼 먹이면 좋을지, 나 또한 무엇을 먹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건강한 식사를 하려고 노력한다.
ⓒ Anna Pelzer, Unsplash
 
달고 짜고 기름진 음식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건강한 식생활을 하는 건 공이 꽤 드는 일이었다. 시쳇말로, 이것저것 다 따지면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남편은 내가 '지식의 저주'에 걸렸다고 놀렸다. 너무 강박적인 게 아니냐고 걱정하기도 했다.

식품 라벨에 집착하는 건 분명 강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움이었다. 실제로 효능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배달음식을 먹은 날과 현미밥에 채소 반찬을 먹은 날은 컨디션부터 달랐다. 위장이 약한 체질이라 탈이 자주 나곤 했는데 이제라도 이런 지식을 알게 되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게 좋았다.

스트레스가 있다면, '외로움'이었다. 일반 우유를 먹이고 싶지 않은 고민, 어린이집에서 백미밥이 너무 자주 나오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 같은 걸 다들 공감해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애들은 아무거나 먹어도 다 잘 커~ 왜 이렇게 머리 아프게 살아~' 라는 말들에 더 머리가 아팠다. 지금 먹는 음식이 몇 년 후에 어떤 결과를 일으킬지 모르는데...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홀로 '예민맘'이 되었다.

원산지 강박과 함께 온 공황 증세 

한 번은 남편과 둘이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집 근처의 프랜차이즈 순두부집에 갔는데, 유기 그릇에 반찬도 정갈하게 나오는데 1인분에 8천원 밖에 하지 않았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의심 많은 나는 원산지 표지판부터 찾아봤다. 

그런데 원산지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다. 원산지 표기는 의무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분명 있기는 있을 텐데, 눈에 잘 띄지 않게 해놓은 걸 보면 국산콩은 아닐 것 같았다. 왠지 찜찜한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초조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분주한 홀에서 놋그릇이 땡강땡강 부딪히는 소리들에 정신이 사나워졌다. 약간 토할 것 같은 느낌도 들면서 숨이 잘 안 쉬어지고, 안절부절못했다.

이걸 꼭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원산지 표지판을 찾아 돌아다녔다. 표지판은 화장실 옆 그늘진 구석에 있었다. 수입산이다.

궁금증을 해결하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지만 불편한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서,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식당을 나왔다. 신선한 공기를 쐬며 걸으니 답답함이 가셨다. 집에 와서 안정제를 한 알 먹었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비상약'이다.

비슷한 증상이 이후에도 몇 번 있었다. 조금만 흥분하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가슴이 갑갑함과 동시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주치의 선생님과 상담을 하며 증상을 다스려 나가고 있다.

'내려놓기'가 그렇게 쉬웠으면 벌써 했지

다들 쉽게 쉽게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힘들게, 불편하게 사냐는 거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벌써 했지. 올리비에 푸리올은 <노력의 기쁨과 슬픔>에서 내려놓기의 어려움을 설파한다.
 
내려놓기는 현대인이 받는 스트레스에 대한 기적의 치료법이라고 일컬어지지만, 보통은 내려놓자는 생각에 집착할수록 더 놓을 수 없게 된다. 한번 생각해보자. 누군가 "그냥 내려놔!"라고 말하면 우리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느새 긴장하게 된다. 생각이란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내려놓자는 생각만 하고 있으면 절대 내려놓을 수 없다. (올리비에 푸리올, <노력의 기쁨과 슬픔>)

아직도 나는 달걀 뚜껑을 열어보고 산다. 일반 마트는 거의 가지 않고, 자연드림, 초록마을 같은 생협을 이용한다. 원산지를 꼭 확인하고 조금 더 비싸도 유기농을 고집한다. 가끔은 나도 이런저런 신경 안 쓰고 아무 거나 먹고, 먹이고 싶다. 하지만 먹는 음식에 따라 대번 몸이 반응을 하는데 무시할 수가 없다.

한 번 알게 된 사실을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다. 까막눈이었던 사람이 글자를 배우고 나면 길거리의 간판들이 저절로 읽히는 것처럼, 나는 이제 알아 버렸다. 강박이든 뭐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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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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