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여제 최정 새 역사를 썼다, 삼성화재배 결승 진출
최정 9단이 세계 바둑의 새 역사를 열었다. 현대 바둑 사상 최초로 세계 대회 결승에 진출한 여자기사로 등극했다. 2013년 12월 이후 무려 107개월째 국내 여자 1위(전체 순위 30위)를 독주해온 한국의 바둑 여제가 세계 바둑 황제의 자리도 겨루게 됐다.
최정 9단은 4일 온라인 대국으로 열린 2022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4강 첫날 경기에서 변상일 9단을 상대로 169수 만에 흑 불계승했다. 3일 8강전에서 중국의 강호 양딩신 9단을 물리치고 한국 여자기사 최초로 세계 대회 4강에 오른 최정 9단은 이날 국내 2위의 강자 변상일 9단도 돌려세우면서 새 기록을 썼다.
최정 9단 이전에 세계 대회 결승에 오른 여자기사는 없었다. ‘철녀’라고 불렸던 전설의 강호 루이 9단도 1992년 응씨배에서 4강에 올랐던 게 최고 성적이다. 최정 9단은 3일 8강전 승리로 루이의 기록과 동률을 이뤘고, 4일 4강전 승리로 철녀 루이가 세웠던 30년 전 기록도 넘어섰다. 국후 인터뷰에서 최정 9단은 “지금까지는 관전자 입장에서 삼성화재배 결승을 지켜봤는데 결승에 올라가게 돼 너무 큰 영광”이라며 “결승에서도 지금까지 뒀던 것처럼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대국 전에는 최정 9단이 불리하다는 평이 우세했다. 예상을 깨고 최정 9단이 중국의 강자 양딩신 9단을 꺾은 기세가 무섭긴 했으나, 변상일 9단의 상승세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변상일 9단은, 2020년 1월 이후 33개월간 랭킹 2위를 지키던 박정환 9단을 밀어내고 한국 바둑 2인자 자리를 꿰찼다. 여태 국제 대회 성적이 국내 대회에 미치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번 대회에선 중국의 당이페이 9단, 구쯔하오 9단을 연파하며 평소 실력을 한껏 드러냈다. 무엇보다 최정 9단과의 전적에서 변상일 9단이 크게 앞섰다. 이 대회 전에 다섯 번 붙었는데, 다섯 번 모두 변상일 9단이 이겼다.
그러나 바둑은 초반부터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최정 9단의 우변 흑집에 침투한 변상일 9단의 백 대마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활이 걸렸다. 변상일 9단의 ‘덜컥수’가 등장한 것이다. 빠른 수읽기는 변상일 9단의 최대 강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수를 빨리 보지만, 그 만큼 결정적인 실수도 많았다. 다 이긴 바둑을 치명적인 실수로 그르친 바둑이 그에겐 유난히 많았다.
최정 9단은 단 한 번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한때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불렸던 유창혁 9단의 제자답게, 워낙 힘이 좋은 바둑을 구사해 ‘소녀 장사’라는 별명이 있는 괴력의 소유자답게 최정 9단은 정확한 수순으로 백 대마의 숨통을 끊었다.
누구보다도 수읽기가 빠른 변상일 9단이어서 자신의 대마가 살 수 없다는 사실도 바로 알아버렸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변상일 9단은 끝내 눈물을 훔쳤다. 바둑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눈물을 보이는 프로 기사는 본 적이 없었다. 눈물을 거두고 다시 바둑에 집중한 변상일 9단이 흑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으나 최정 9단이 차분하게 응수하며 20점이 넘는 백 대마를 잡아버렸다. 패배를 재차 확인한 변상일 9단이 항복을 선언하고 자리를 뜨자, 그제야 최정 9단은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최정 9단의 결승 상대는 5일 열리는 당대 최강자 신진서 9단과 이 대회에서 강력한 다크호스로 떠오른 8위 김명훈 9단과의 대결에서 가려진다. 대망의 결승은 오는 7일부터 3전2승제로 열린다.
2022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는 중앙일보가 주최하고 삼성화재해상보험이 후원, 한국기원이 주관한다. 각자 제한시간 2시간, 1분 초읽기 5회가 주어진다. 상금은 우승 3억원, 준우승 1억원.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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