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54>] 술과 가정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53화 술과 가정
그 이후 조무락은 다른 현장을 찾아가 일을 얻곤 했지만 얼마 못가 술 때문에 내쫓기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몇 현장을 전전하다보니 조무락은 관내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사가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찾아다닐 현장이 없게 되자 조무락은 더 많은 술을 마셨다. 타 도시의 현장에 나가는 방법이 하나 남아있긴 했지만 조무락은 잔뼈가 굵은 관내 현장에서의 외면에 충격 받아 더 이상의 구직 노력을 포기한 채 집에 틀어박혀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알코올중독은 그 속성상 멀쩡한 술꾼을 그냥 술꾼으로만 남아있게 하지 않는다. 차라리 밥 먹듯 술 먹고 물마시듯 술 마시더라도 정물처럼 가만히 있어만 준다면 가족들도 견딜만할 텐데 알코올중독은 술꾼을 가정의 폭군이자 애물단지로 만들고 국가와 사회의 시한폭탄으로 만들어 버린다. 조무락 역시 알코올중독의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무락이 술 때문에 일을 놓으면서 가정경제는 전적으로 아내의 책임이 되었다. 마트에서 파트타임 일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아내는 허구한 날 술에 취해 꼴불견인 조무락에게 신세한탄마냥 지청구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무락은 마치 아내의 불평불만을 기다렸다는 듯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조무락의 집은 시나브로 가족의 휴식처가 아닌 공포의 도가니가 되고 말았다. 아내와 딸들은 집에 들어가는 게 겁나서 점점 바깥으로 나돌게 되었다. 그러면 조무락은 아내의 늦은 귀가를 불륜과 연관 지어 의심하면서 폭력을 행사하고, 그러면 아내의 귀가는 더 늦어지고, 그럴수록 조무락의 폭행은 강도가 더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결국 아내와 딸들은 조무락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어느 날 밤 정신병원에 전화를 하게 된 것이었다.
“얼굴 생김새는 무섭게 보여도 예전엔, 술 적당히 마실 때엔 천사가 따로 없었어요.”
조무락의 아내가 옛 생각에 잠기는지 온화한 미소를 짓더니 주치의 이희수에게 말했다. 이희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 입원하는 대다수가 술이 문제지 사람 자체가 문제인 경우는 드물었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악조건에 발목 잡혀서 자구책, 해소책으로 음주를 일삼게 된 사람들에게 사회가 나서서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이희수는 생각했다.
“옛날로 돌아올 수 있게 꼭 좀 도와주세요, 선생님.”
조무락의 아내가 이희수에게 머리를 주억거렸다. 말투와 행동에서 진심으로 간절한 염원이 묻어나왔다. 남들 같으면 흔히 이혼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경우에 처해있으면서도 조무락의 아내는 조강지처의 면모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아빠 술 끊을 수 있지?”
면회실에서 조무락의 딸이 물었다. 모전여전이라고나 할까. 딸의 눈빛 역시 간절하기 그지없었다. 눈이 퀭하게 들어간 조무락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끊고 싶어. 그런데 자신이 없어.”
조무락이 계속 말을 이었다.
“병원에만 있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병원비도 만만찮고…. 계속 요양한다고 병원에만 있을 순 없잖아. 내가 나가서 일을 해야지.”
돈 들어갈 걱정에 조무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제껏 우리가 술 마셔서 국가에 헌납한 세금과 소비행위로 경제를 살찌웠으니까 지금부터는 국가에서 세금을 들여 우리를 치료해야지.”
조무락 가족의 대화를 엿듣던 주만수가 대뜸 끼어들었다. 주만수는 면회실의 한쪽 테이블에 김석규와 함께 앉아 과자봉지를 뒤적이던 중이었다. 김석규와 주만수는 무료한 병원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동료환자들의 면회가 있을 때면 귀동냥이라도 할까 싶어 슬그머니 병실을 따라나서곤 했다.
“치료비만 해준다고 끝나나요? 치료받는다고 일을 못하니 일당을 줘야죠. 그래야 맘 편하게 치료받고 술 끊을 것 아녜요.”
김석규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실비보험 든 것도 아닌데 무슨 일당씩이나 줘요. 그냥 치료만이라도 시켜줬으면 원이 없겠네요.”
조무락의 아내가 눈물을 훔쳤다. 김석규는 국민이 세금 내는 게 바로 이런 경우를 대비하는 거 아니냐고, 우리나라에 태어나 살고 있는 자체가 바로 국가에 보험 든 거 아니냐고, 국가는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알코올중독자나 그 가족은 국민 아니냐고 말하면서 조무락의 아내를 위로했다.
“맞죠? 장 기자님. 알코올중독자가 그만큼 병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많은 술을 마시고 얼마나 많은 일을 했겠어요. 그러면 국가에서 위로 겸 치료를 해주어야지요. 그게 국가 아니에요?”
김석규가 별안간 장 기자에게 동의를 구했다. 장 기자는 기습적인 질문에 당황한 듯 눈만 끔벅거렸다.
“장 기자님. 조무락 씨 가족이 집에서 얼마나 폭력에 시달렸는지 아세요? 말도 못해요. 그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노릇이죠. 그런데도 이혼을 한다거나 나 몰라라 하지 않고 끝까지 조무락 씨를 보듬으려는 게 얼마나 가상해요. 만약 가족이 알코올중독자를 포기해 보세요. 사회가 책임져야 해요. 알코올중독자들은 살아있는 시한폭탄이에요. 그런 위험한 존재를 가족이 책임져 주겠다는데 국가와 사회는 고맙다고 냉큼 절하고 당장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하는 거 아녜요. 그렇죠, 장 기자님?”
김석규의 열정적인 발언에 장 기자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천정을 주시했다. 한 동안 좁은 방 안에 침묵이 안개처럼 꽉 들어찼다. 그때 마침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방선희가 소고기 구울 준비를 다 해놓았으니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김석규와 이철백은 생각에 잠긴 장 기자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장 기자가 고민을 한다고 해도 당장 근사한 해답이 떠오를 게 아니라면서 냉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금방이라도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도록 방선희가 툇마루에 세팅을 해놓고 있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커다란 불판을 올려놓았고 기름장이며 된장, 김치와 야채, 심지어 파조리개까지 그야말로 제대로 된 차림이었다. 특히 메인 메뉴인 등심과 갈빗살은 선홍빛이 감도는 것이 아주 싱싱해 보였다.
“술은 준비하지 못했어요. 대신 음료수 맘껏 드세요.”
방선희가 불판 위에 등심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괜히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아 미안한데요.”
김석규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안한 기색 없이 흡족해 하는 얼굴이었다. 장 기자와 이철백이 다소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어느덧 툇마루에 겨울 햇볕이 따뜻하게 들고 있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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