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니까 엄마를 챙겨야지..." 뻔뻔함에 분노가 일었다 [양민영의 한 솔로]
[양민영 기자]
나는 비밀을 다루는 데 능숙하다. 그러나 특별히 '다룬다'고 할 수 없는 게, 비밀을 다루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마음 깊은 곳에 넣어두고 무슨 일이 있어도 꺼내지 않으면 된다. 그 단순한 행위는 묘하게 중독적이라서 그저 어떤 일을 숨기는 것만으로도 쉽고 확실한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그게 내가 어려서부터 비밀에 몰두한 이유였다. 별것도 아닌 일이 비밀이라는 이름을 달고 봉인되어 마음에 쌓였다. 결국 나는 말하기보다 말하지 않는 것, 드러내기보다 감추는 게 편안한 어른이 됐다.
그러나 근래 웬만한 비밀은 다 터놓는, 거의 유일한 통로를 만들었다. 나에게는 좀처럼 있을 수 없는 변화였다. 우연히 사려 깊은 정신 건강전문의를 만났고 그에게 모든 걸 말하기로 결심했다. 비밀을 말하자 그는 나에게 '생각이 너무 많다', 그리고 '마음이 여리다'고 했다. 그 두 가지 촌평은 전부터 가족, 친구, 연인에게 심심찮게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병원을 나서서 돌아오는 길에, 그 후로도 한참 생각했다. '여린 마음'이라는 게 뭘까? 내구성이 떨어진다, 혹은 자극의 역치가 낮다는 뜻일까. 그러니까 흔한 말로 예민한 걸 '여리다'고 표현하는 걸까. 아니면 작은 일에도 휘둘리고 마음을 너무 많이 쓴다는 뜻일까.
한편으로는 여리지 않은 마음은 어떤지 궁금했다. 내가 겪은 일을 모두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여린 마음은 나약하다는 걸 돌려서 표현한 것에 불과한가. 다음에 선생님을 만나면 여린 마음 관해서 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 이 도시에서 보낸 유년과 내 삶까지 전부 별것 아닌 비밀처럼 느껴졌다 |
ⓒ 게티이미지뱅크 |
"너는 딸이잖아. 딸이니까 엄마를 챙겨야지."
딸이 되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뻔뻔함에 눈이 뒤집히는 분노가 일었다.
왜 내가 필요한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에게 위로받으면 될 일이 아닌가? 내가 태연한 모습으로 낮을 보내고 밤이면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는 걸 알기나 할까? 희미하게 죽음을 떠올리다가 겨우 잠드는 건 아는지?
결국 감정의 하수처리장으로 나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없다. 어릴 때부터 길들어서 감정이입과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누구보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내가 아니고서야 신세 한탄이 그다지 즐겁지 않은 거라고 생각할밖에. 그러자 엄마의 자기중심적인 면면이 원망스럽다 못 해서 두려웠다. 어디까지 도망쳐야 하나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했다.
연락을 끊은 지 6개월째 우연히 고향에 다녀올 일을 부탁받았다. 역으로 마중 나온 현지 직원은 몇 시간의 업무 공백이 너무나 반가운지, 바다를 구경하고 점심을 먹자고 했다. 나는 그를 따라서 골백번도 더 갔던 해수욕장을 구경하고 그 지겨운 회무침을 얻어먹었다.
이곳에 온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다. 거짓을 지어낸 게 아니었다. 늘 그렇듯 굳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비밀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자 이 도시에서 보낸 유년과 내 삶까지 전부 별것 아닌 비밀처럼 느껴졌다. 특별히 꾸며낼 게 없으나 굳이 말할 것도 없는.
그리고 고민 끝에 엄마를 만나기로 했다. 서울행 KTX를 기다리는 동안 안부만 확인할 참이었다. 그런데 엄마를 다시 본 순간 선생님이 '여리다'고 진단한 내 마음의 축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기다리기로 한 대형마트의 입구 주변, 여러 사람이 오가는 중에도 한눈에 당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전보다 부피가 반쯤 줄어버린 앙상한 몸이 눈에 들어왔다. 입고 있는 검은색 바지가 꼭 커다란 막대에 씌어 놓은 허수아비 옷처럼 바람에 펄럭였다.
카페의 조명 아래 마주 앉았을 때는 반들거리는 두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돋은 모습이 몹시도 늙고 지쳐 보였다. 엄마는 거의 4~5개월간 먹지도 자지도 말하지도 않았고 체중이 13킬로그램이나 줄어든 채로 내 앞에 나타났다. 그제야 오빠와 외삼촌이 번갈아 가며 전화한 이유를 알았다.
오래전에 내 엄마였던, 낯설고 노쇠한 모습과 마주하자 말문이 막혔다. 내가 외면한 동안 엄마가 천천히 죽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 내버렸다고 생각한 죄책감을 다시 불러들였다. 엄마는 아마도 화병이라고 불리는 증상을 앓았던 것 같다. 엄마 주변의 남자들, 그러니까 아버지, 오빠, 외삼촌은 그조차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누구도 엄마를 살려낼 방도는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연락만 강요했다.
▲ 어둠이 내려앉은 선로는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
ⓒ 게티이미지뱅크 |
언젠가부터 엄마를 생각하면 실패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엄마는 포기이자 좌절이고 내가 두려워하는 삶 자체이다. 나는 어쨌거나 교육받았고 평생 비혼일 것이므로 그와 다르게 살 게 분명한데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어떤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엄마처럼 살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소설가 아니 에르노는 '저급한 진실은 없다'고 했다. 그 말에 기대서 이제는 비밀도 아닌 일을 말하려 한다. 여성 혐오는 어떤 여성을 천천히 죽인다. 그리고 모든 딸에게 영원한 상처를 남긴다. 엄마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당신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그것과 틀에 박은 듯 닮았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는 아들에게만 베풀고 딸이란 영 쓸모없는 존재는 아니나, 어디까지나 잉여이고 부수적인 존재다. 그러나 내면화된 여성 혐오 때문에 당신은 그런 딸도 아들과 똑같이 사랑하고 아낀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상속에서는 제외한다.
언젠가 엄마는 당신이 아들과 딸을 공평하게 대학까지 마치도록 했으니 둘을 차별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할머니도 당신이 베푼 아량 덕분에 당신의 딸은 훨씬 대우받았다고 했다. 그러니 할머니와 엄마가 그랬듯 엄마와 나 사이에도 어쩌면 지금보다 더 지독한 일이 남았는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여자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그건 희망을 닮은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가슴과 정신에 상처가 없는, 비굴할 이유도 애써 침묵할 필요도 없는 아이. 그 아이는 완벽하게 재건된 나의 분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가 영원히 태어나지 않도록 하고 대신에 나를 끌어안았다. 그 무수한 상처까지 함께.
여린 마음을 안고 어디로, 어디까지 도망쳐야 하는 걸까. 어둠이 내려앉은 선로는 무엇도 보이지 않고 열차는 서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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