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버전 '80일간의 세계 일주', 이점이 다르다

이정희 2022. 11. 4.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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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왓챠 < 80일간의 세계 일주>

[이정희 기자]

지금의 젊은 세대는 모르겠지만, 60-70년대 생이라면 누구나 '쥘 베른'의 작품을 한번쯤 접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꼭 원작은 아니어도 말이다.

하다못해 고 고우영 화백이 그린 만화로도, 소년소녀 명작 전집의 축약본으로, 그게 아니면 성룡 주연의 영화로, < 80일간의 세계 일주 >를 비롯하여, <해저 2만리>, < 15소년 표류기 >,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등의 작품을 만났다. 
 
 80일 간의 세계일주
ⓒ 왓챠
 
그 중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라면 < 80일간의 세계 일주 >가 아닐까 싶다. 1873년 출간된 이 작품은 영국의 '신사' 필리어스 포그가 프랑스 하인 장 파스파루투를 데리고 80일 동안 세계 일주를 떠난다는 내용이다.

영국 식민주의 시대, 그리고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증기기관차가 다니고, 기구가 막 세상에 등장하던 시절, 필리어스 포그는 이러한 '문명적 수단'을 활용하여 80일 만에 세계를 일주할 수 있다는 기사를 접하고 클럽 동료들과 내기를 건다.

클럽으로 가는 걸음 수를 정하고, 면도물 온도가 약간 맞지 않는다고 하인을 해고한 필리어스는 자신이 믿는 '과학적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배를 타고 프랑스로 건너가, 이탈리아로 기차를 타고, 다시 거기서 배를 타고 이집트로, 인도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어지는 여정인데, 이 여정을 통해 작가 쥘 베른은 자신의 진보적인 세계관을 펼쳐낸다. 
 
 80일 간의 세계일주
ⓒ 왓챠
 
'80일간의 세계 일주' 속 현대적 시각

그간 고전을 21세기적 세계관에 맞춰 재해석해왔던 영국의 BBC가 < 80일간의 세계 일주 >를 작품화했다. 우리에게는 가장 인기있었던 <닥터 후> 시리즈의 주인공이던 데이빗 테넌트가 전형적인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로 돌아왔다. 익숙한 이야기, 친근한 배우 덕분일까, 왓차의 인기 프로그램 순위에 꾸준히 올라 있다. 그렇다면 데이빗 테넌트 버전 < 80일간의 세계 일주 >에는 어떤 현대적 해석이 들어가 있을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일행이 한 명 더 늘었다는 점이다. 클럽에서 필리어스의 관심을 끌었던, 80만에 세계 일주가 가능하다는 기사를 쓴 주인공, 애비게일이 합류했다. 자신의 기사를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에비게일은 필리어스의 친구였던 아버지의 이름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을 딴 에비게일 픽스로 길을 떠난다.

또 주목해야 할 사람은 흑인 배우 이브라힘 코마가 분한 하인 파스파르투이다. 흑인 루팡과 여성 홈즈가 새로이 해석되는 시대, < 80일간의 세계 일주 >는 프랑스 출신 하인 파르파르투를 흑인으로 설정한다. 유색인종 파르파르투는 그가 가는 곳곳마다 편견과 오해를 맞주하게 된다. 드라마는 이런 인종적 갈등을 서사의 씨줄로 삼는다. 싸움을 피해 필리어스 포그의 하인이 된 그는 사실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아버지를 보고 도망치듯 떠나 전세계를 떠돌던 이다. 원작에서도 온갖 아력을 자랑하던 캐릭터의 업그레이 버전으로 그는 다양한 외국어 구사에, 도둑질까지 해결사이자, 트러블 메이커가 된다. 

2만 파운드를 내기를 걸고 떠난 필리어스, 하지만 그는 원작과 달리, 클럽만 오가는 '샌님'이었다. 심지어 오래 전 사랑하는 여인과 세계 일주를 떠나자고 약속해놓고 그녀를 남겨둔 채 도망친 적이 있는 겁쟁이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받은 '시계탑 사진' 뒤의 'coward(겁쟁이)'라는 단어를 보고 뒤늦게 출발을 결심한다.

이처럼 드라마는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원작의 행로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리버풀조차 가보지 않은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와 에비게일, 파르파르투의 성장 서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여정을 진보적 시각을 설파한다. 
 
 80일 간의 세계일주
ⓒ 왓챠
 
저마다의 과업이 된 세계일주 

'우물 안 개구리' 같았던 필리어스 포그, 그는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방문 중, 인도인 여주인에게 당당하게(?) 영국이 철도도 놓아주고 인도를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던 그가, 때로는 본의 아니게, 때로는 스스로의 의지로 가는 곳마다 여러 사건에 개입하며 편협했던 의식을 변화시켜 나간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탈영한 용병의 입장에서 변호를 아끼지 않는다. 프랑스로 가는 배 위, 처음 타본 배멀리에 구토를 하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던 그는 증기 기관차의 나무 벽을 떼서 태우며 무너져 가는 다리를 건너는 모험도 불사른다.  

특히 미국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 8>처럼 백인우월주의자를 호송하는 흑인 보안관과 동행한 상황에서, 그는 백인이자 영국인으로서 그간 그가 가져온 신념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부딪친다.

무인도에 떨어지고, 감옥에 갇히고, 목숨이 경각에 이르는 상황을 겪으며 백인 부르조아 필리어스의 세계는 깨져간다. '겁쟁이'였던 그는 이제 하인과 그저 여자 기자였던 파스파르투와 에비게일을 기꺼이 '친구'라 부르게 된다.  

필리어스 포그가 백인 부르주아로서의 자기 세계에 갇혀 있었다면 에비게일이 넘어야 할 인생의 산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버지가 하던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약하던 그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지만 여전히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딸이었다. 아버지의 성대신 어머니의 성을 가지고 세상 밖으로 향했지만 늘 그녀는 기사를 썼고, 그 기사를 아버지가 기사화했는가 확인했다. 

하지만 영국 사교계에서 지탄받는 여성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녀를 통해 협잡꾼인 아버지의 실체를 알게되며 에비게일의 세상은 무너진다. 이제 진짜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에비게일이라는 존재로 세상에 다시 첫 발을 내디딘 그녀. 필리어스 포그를 따르는 기자가 아니라, 때론 그와 파스파르투의 목숨을 구할 정도로 거침없는 모험의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혁명가였던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쳤던 파스파르투,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혁명가로 성장한 동생이었다. 그리고 다시 동생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 파스파르투는 늘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한 발 비껴선 채,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필리어스 포그의 하인으로 여행 파트너의 일원이 된 파스파르투는 내내 존재론적 고민을 하기도 하고 여행 자체가 중단될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파르파르투는 늘 위기의 세 사람을 구해내며 하인이 아니라 친구가 된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만난 인종 갈등 상황에 자신을 내던지며 도망자라는 딜레마를 극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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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s://5252-jh.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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