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의 시시각각] 이태원이 세월호가 안 되려면
1001일째 아침을 맞는 칠면조는 행복했다. 자신을 향한 주인의 손에는 당연히 모이가 있을 테니. 그런데 그 손이 칠면조의 목을 움켜쥐었다. 칠면조는 그날이 추수감사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행복했던 1000일은 1001일째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투자 전문가 나심 탈레브의 책 『블랙 스완』에 나오는 우화다.
어찌 투자의 세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겠는가. 이태원 참사는 칠면조의 1001번째 날이었다. 아무도 예견 못 한 '블랙 스완'이었다. 확률분포의 극단 중 극단에 있던 가능성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말은 사후 확증 편향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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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핼러윈 참사는 예측 어려운 비극
그래도 정부 무한책임 인정해야
사과와 문책에 뜸 들일 이유 없어
」
코로나19 이전 3년간(2017~2019년) 핼러윈 직전 토요일 이태원역 하차객 수는 6만 명 선이었다. 올해는 8만 명이었다. 매년 37~90명이던 경찰 투입 인력은 올해 137명이었다. 인파는 30% 늘었지만, 경찰 인력은 최소 50% 늘었다. 그런데도 사고를 막지 못했다. 특정 수치를 넘기면 물리 현상이 달라지는 '임계치'를 생각 못 한 것이다. 서울경찰청 112상황실은 숨넘어가는 신고를 연거푸 받고도 상황 파악을 시도하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용산경찰서에 전파했고, 경찰서는 다시 일선 파출소로 넘겼다. 역시 극단의 가능성을 예상 못 한 탓이다.
이태원 참사는 윤석열 정부의 불운임이 틀림없다. 누군가는 "문재인 정부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근거 없다. 국가 행정 시스템의 역량과 관행이 몇 달 만에 확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정부가 스스로 이 불운을 한탄하며 무한 책임을 부인하는 순간, 문제가 달라진다. 외재하던 리스크가 정권 내부로 스며든다.
"경찰을 미리 배치한다고 해결될 수 없었다"는 이상민 행안부 장관의 발언에는 이 사건을 불운으로 보는 시각이 깔렸다. 그 생각을 드러내자 여론의 화살이 정부로 쏟아졌다. 압력은 이태원 비극의 골목길에만 쌓이는 게 아니다. 감당 못 할 사태를 겪은 공동체의 분노는 배출구를 찾는다. 총리의 허튼 농담, 장관의 책임 회피는 그 무시무시한 압력을 건드렸다.
민주당은 정쟁 자제 모드에서 공세로 돌아섰다. 지도부의 한 초선 의원이 "반 박자 느리게 가야 역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정치가 여론전임을 제대로 간파했다. 그렇다면 여권의 대응은 한 가지다. '반 박자 빠르게' 행동하는 거다. 이상민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 문책이 피할 수 없는 수순이라면 망설여서는 안 된다. "사건 수습이 먼저"는 안이한 판단이다. 수습 자체에 문책이 포함돼야 한다.
사과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때 박근혜 대통령의 공식 사과는 사고 발생 14일 만에 국무회의에서 나왔다.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20일 뒤 대국민 담화를 또 해야 했다.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숙였지만, 여론은 이미 돌이킬 수 없어졌다. 용산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이미 추모식장 등에서 여러 차례 유감의 뜻을 밝혔다"고 했지만, 어림없다. 공식적이고 진지한 사과 담화가 신속하게 나와야 한다. 그 사과에는 '미안하다'는 말뿐 아니라 '내 잘못입니다'와 '이렇게 고치겠습니다'가 들어가야 한다. 첫 사과에서 '내 탓이오'보다 '적폐 청산'을 강조했다가 여론의 반발을 자초한 박 전 대통령의 우(愚)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참사의 정치화'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익숙해져 버린 풍경이다. 가짜뉴스, 비논리적 인과 주장, 거친 구호가 벌써 시작됐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섣부른 대응은 자칫 '정치의 참사화'를 부를 뿐이다. 비극을 정쟁에 이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비극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태도도 역풍을 부른다. 행안부가 '참사, 희생자, 피해자' 대신 '사고, 사망자, 부상자'로 표기하라는 공문을 각 시·도에 보냈다. 괜한 짓이다. 진지하고 신중한 자세로 중도층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숙제다. 실패한다면 민심의 손이 정권의 목덜미를 움켜쥘 수도 있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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