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정부 탓, 피해자 탓, 아니면 핼러윈 탓?

2022. 11. 4.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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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과 희생양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19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의 대표작으로 ‘스케이프고트(The Scapegoat)’라는 그림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희생양’으로 번역되곤 한다. 염소 한 마리가 황량한 소금호수에서 빈사 상태로 헐떡거리고 있고, 그 주변에는 염소의 비극적 미래를 암시하는 짐승의 뼈들이 흩어져 있다. 구약성서 레위기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속죄의 날’ 명절에 염소 한 마리를 골라 그 머리에 손을 얹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낱낱이 읊어 그 죄를 염소가 짊어지게 한 후 광야로 쫓아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인들은 자연재해와 전쟁 같은 재난이 죄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 생각해서 그 벌을 피하고자 이런 속죄 의식을 거행했다. 사회구성원을 안심시키고 뭉치게 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정작 재난을 막는 데에 아무 효과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영어 단어 ‘스케이프고트’는 사회를 뒤흔드는 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회구성원들의 편의에 따라 그 문제의 잘못을 모두 뒤집어쓰고 손가락질받는 개인 또는 소수집단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문자 그대로 ‘희생양’인 ‘새크리피셜 램(sacrificial lamb)’과 뉘앙스가 약간 다르지만, 둘을 같은 뜻으로 혼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스케이프고트를 희생양으로 번역해도 큰 문제는 없다. 지금부터 이 글에서 논할 ‘희생양’은 스케이프고트를 뜻하는 것이다.

「 폭탄 돌리기하듯 희생양 찾기 나서
전문가 ‘가장 쉽고 나쁜 해결 방법’
핼러윈이 국적불명 문제라면 K팝은
사고 못 막은건 시스템으로 풀어야

윌리엄 홀먼 헌트의 ‘스케이프고트(희생양)’ [사진 리버풀 국립미술관]

동서고금 막론하고 사회에 큰 재난이 났을 때 사람들은 그 탓을 할 희생양부터 찾는다고, 미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지진학자 중 한 사람인 루시 존스는 말했다. 그녀는 저서 『재난의 세계사(원제: The Big Ones: How Natural Disasters Shaped Us)』(2018) 에서 여러 부분에 걸쳐 희생양 찾기의 부작용을 언급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자연재해지만 현대의 자연재해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는데도 줄이지 못한 인재(人災)를 겸하는 경우가 많아서, 모든 재난에 적용할 수 있다. 특히 제9장에서 집중분석하는,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 시(市)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가 그렇다. 명확한 사망자 수만 1464명에 이르는 카트리나 재난을 한국에서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속수무책인 상황과 이재민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어떻게 선진국에서 저런 일이?’하며 모두 충격을 받았었다. 당사자인 미국인들의 충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희생양을 수도 없이 많이 찾아냈는데 그중에서도 (…) 두 의견이 가장 우세했다. 바로 정부의 잘못, 그리고 희생자들의 잘못이었다.”라고 존스는 말한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카트리나와 이태원 압사사고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카트리나는 자연재해여서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는 한편, 다년간의 허리케인 경험과 전문가들의 정확한 예측 시나리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줄일 수 있었던 피해를 줄이지 못했으므로,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이태원 참사보다 더욱 인재였던 측면도 있다. 그러니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며 다만 그 재난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수습에 관해 전문가 존스의 논평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를 탓하는 심리

카트리나 당시 뉴올리언스 시민 중 10만 명이 대피 지시를 어기고 남아있다가 화를 당했다. 희생자에게 동정과 구호를 보내면서도 자업자득을 지적하는 미국인도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언론은 만연한 무법 상태와 폭동처럼 보이는 상황을 묘사하며 우리 모두로부터 희생자의 잘못을 찾아내려는 충동을 이끌어냈다.”라고 존스는 말한다. 사실은 시민 중에는 자동차가 없거나 너무 늦게 대피 명령을 들어서 불가피하게 남아있던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희생자를 동정하면서도 “희생자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자신을 희생자들과 분리하려는 인간의 욕구,” 즉 ‘안타깝지만 저 사람들은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와 내 가족은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라는 인간의 욕구는 언제나 살아있다고 존스는 일침을 가한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반응들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특히 한국 언론의 ‘구급차 옆 떼창’ 등의 여과 없는 보도 및 ‘거기 간 사람들이 다 저렇지’ 식으로 빈정거리는 댓글들과 겹쳐진다. 실제로 저런 이들도 일부 있었겠지만, 그것이 이 압사사고의 핵심은 아니다.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김은미 교수는 “한국 뉴스가 대중에게 전달되는 방법이 주로 포털을 통해서 슈퍼마켓 선반에 진열되듯 보여지다보니 경쟁 속에 속보와 자극적인 뉴스에 집중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지난 1일 서울 용산 원효로 실내체육관에 마련 된 이태원 사고 관련 유실물 센터에 놓인 사고 현장의 유실물들. [연합뉴스]

누군가는 ‘자연재해로 죽은 사람들과 놀다가 죽은 사람들을 어찌 비교하는가’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거기에 왜 갔나” “일하다 죽은 게 아니라 놀다가 죽은 사람들에게 애도기간까지 가져야 하나”라는 말들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적지 않게 나온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일도 하고 놀기도 하는 인간이다. 게다가 놀이야말로 인류 문화의 기원이고 원동력이라고 네덜란드 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1938)에서 주장했다.

“왜 국적불명의 귀신 명절을 지내다 이렇게 되었느냐”라는 핼러윈 탓도 나온다. 엄밀히 말하자면 핼러윈은 “국적불명”이 아니라 국적이 미국인 명절, 정확히는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발달시킨 명절이다. 그런 핼러윈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입한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나쁜가? 분장을 하고 클럽에 가는 게 과연 우리 전통과 아무런 접합점이 없을까? 상고시대에 우리 조상들도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탈 쓰고 음주가무를 했으며, 고려시대에는 그런 행사가 화려한 볼거리로 발전한 팔관회와 나례가 있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을 혐오한 조선의 유교문화와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축제를 즐기는 흥이 잠재해 있는데 지낼 축제가 다 없어졌으니 외국 축제라도 수입해서 즐기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현대문화는 혼종성(hybridity)이 특징이다. 지금 세계를 휩쓰는 K팝과 K드라마는 미국 대중음악과 할리우드의 영향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번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6명이라는 비극적인 숫자 속에 외국인이 무려 14개국 26명에 달하는 것은, 이태원 자체가 전통적인 다문화 거리이기도 하지만, 한국화된 이태원 핼러윈 축제가 국제적인 문화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유튜버들이 사고 직전에 찍은 영상을 보면 무척 정교하고 창의적인 분장을 한 사람들도 눈에 띈다. 누가 그런 축제가 재앙과 비극이 될 줄 알고 거기에 갔을까.

“재난은 인간성에 대한 위협”

다시 지진전문가 존스의 『재난의 세계사』에서 카트리나 참사로 돌아가 보자. 희생자 탓을 하는 것과 달리 정부 탓을 하는 것은 과연 근거가 많다고 존스는 말한다. 당시 시 정부, 주 정부, 연방정부 사이의 긴급 협조체계가 엉망이었고 다년간의 허리케인 경험과 전문가들의 뛰어난 예측 시나리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구할 인력과 물자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 “관료들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보고는 최상의 시나리오에 해당하는 자원만 제공하는 고전적인 사례”였다. 게다가 정부는 “허리케인 이전, 도중, 이후에도 국민들을 돕는 데 실패했다”고 존스는 준엄하게 질책한다.

하지만 동시에 존스는 말한다. “어떻게 다르게 대처할 수 있었을지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게 큰 실패가 일어나려면 여러 주체들의 수많은 작은 실패가 있어야 한다. (…) 카트리나의 경우, 정부가 주민들을 실망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실패는 훨씬 전에 만연해 있던 문제들에서 비롯됐다.” 즉 정부기관과 관료 중에 특정 주체, 특정 개인을 골라내서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조리돌림하는 것은 매우 쉽지만 오히려 재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세우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떨까. 이태원 참사의 경우, 주최자 없는 군중의 모임을 어떻게 제어하고 압사사고를 방지할지에 대한 매뉴얼 자체가 그간 없었다. 또한 김은미 교수가 추천한 LA타임스의 기사대로 핼러윈에 대한 관심의 세대간 격차 때문에, 정부 당국과 언론 등 기성세대 그 누구도 이런 사태가 일어날지를 예측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이 정부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당일에 압사 가능성 신고가 수차례 들어왔음에도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 등 여러 문제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를 끌어내리고 조리돌림하는 게 아니라 수습을 하고 매뉴얼과 시스템을 세우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오로지 자신이나 자기 진영의 정치권력에 대한 욕심에서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선동을 하는 이들은, 희생자에게 악플을 다는 이들과 다를 바 없게 보인다.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존스의 말이 있다.

“재난의 가장 무서운 위협은 우리의 인간성에 대한 위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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