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정권 생존 위협하는 두 가지: 핵무기와 북한 주민 [에버라드 칼럼]
치를 대가 알면 쉽게 사용 못 해
엘리트 이탈, 주민 분노 더 걱정
NPR "북한, 핵 사용시 정권 붕괴"
치를 대가 알면 쉽게 사용 못 해
엘리트 이탈, 주민 분노 더 걱정
미국이 지난달 27일 핵 태세 검토 보고서(NPR)를 공개했다. 2018년 NPR처럼 이번에도 “김정은 정권이 핵무기를 사용하고도 생존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없다”고 경고했다.
정말 그럴까. 북한 정권이 핵무기를 쓰고도 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이냐에 달렸다. 그 대가는 핵무기의 규모·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은 미국이 “동맹국 방어를 위해 핵과 재래식 무기, 미사일 방어 등 군사 능력을 최대 활용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신중한 표현은 미국이 북한의 핵 공격에 반드시 핵 역량으로 대응하진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북한이 미국의 도시를 핵으로 공격하면 미국은 핵으로 응징하겠지만, 요격에 성공한다면 어떻게 할까. 그래도 핵으로 응징할까, 아니면 엄청난 재래식 무기로 노동당 본부를 공격할까. 또 북한이 전술 핵무기로 미국이나 한국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할까. 미국은 괌에 배치된 전술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로 응징할 것이고, 전략 핵무기로 상황을 고조시킬 가능성은 작다.
이런 미국의 대응으로 북한 정권이 붕괴할까. 북한에는 고도화된 현대 무기에도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지하 벙커가 있다.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와 핵탄두를 옮겨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핵 공격을 감행하고도 벙커로 들어가 전쟁을 지속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하벙커는 핵무기나 강력한 재래식 무기 공격에 파괴될 수도 있다. 얼마나 깊이, 강고하게 만들었는지가 관건인데 CIA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한 땅을 한국과 미군이 장악해도 김정은 충성파가 산악지대에서 끝까지 저항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사용은 분쟁 종식이 아닌, 방사능으로 오염된 땅에서의 지루한 전쟁을 의미한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9월 제정한 핵 무력 정책 법령에서 북한은 군 사령 체계가 위험에 처하면 선제 핵 공격이 가능하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우발적 핵무기 사용 위험성은 커졌다. 의도적 사용 가능성도 존재한다. 북한은 한국을 공격한 뒤 미국이 개입하면 전략 핵무기로 미국을 공격할 수도 있다. 북한 정권의 성격상, 정권 붕괴가 불가피하다고 여기면 파국임을 알면서도 핵무기를 쓰고 장렬히 사라지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북한 정권의 지상 과제는 정권 생존이라고들 하지만 극단 상황에선 자멸적·비합리적 결정도 가능하다. 북한의 핵무기 사용 여부는 미국의 실제 행동보다 북한이 미국의 행동을 어떻게 예측·판단하느냐에 달렸다. 냉전 핵 경쟁 시대 심리전과 같다. 핵을 쏜 뒤 한·미의 대응으로 정권이 괴멸할 것으로 판단하면 북한은 핵을 쉽게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정책은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나 미국을 경험한 적 없는 소수의 늙은 남성들이 결정한다. 미국인은 멍청한 겁쟁이라고 믿는 북한 고위층은 핵 공격을 해도 미국이 겁을 먹고 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미국의 대 우크라이나 지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최고 지도자의 의견에 맞서지 않을 것이고, 핵 공격 이후의 대가를 아는 군사 전문가도 김정은의 뜻을 거스르진 못한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겨져 온 북한의 재래식 미사일은 최근 저수지 발사가 가능할 정도로 고도화했다. 한·미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뚫고 심각한 피해를 줄 것이다. 미 정부는 NPR에서 “북한은 핵이 아닌 다른 전략적 공격도 감행할 수 있다. 미국의 핵무기는 이런 공격 억제에도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처럼, 미국 역시 북한의 비핵 공격에 핵무기로 맞설 수 있다는 경고다. 북한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은 작지만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며, NPR 주장과 달리 핵을 쓰고도 북한 정권은 괴멸되지 않은 채 끝까지 반격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정권을 더 위협하는 게 있다. 간부들의 충성심 균열이다. 지난달 17일 노동당 간부학교에서 김정은은 “반사회주의 및 비사회주의적 현상들” “기회주의적 반혁명적 사상 경향들” “비조직·무규율·부정적 요소들”을 지적하며 놀랍게도 노동당이 “인민의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불안감은 명백하게 드러났다. 한·미에 의한 축출보다 주민에 의한 정권 붕괴를 김정은은 더 걱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의 핵무기 사용 여부에 대한 답은 못 얻겠지만, 그 자체로 좋은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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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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