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휴일] 식물성 피

2022. 11. 3.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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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차의 기름통에선
몇 리터의 은하수가 똑똑 새어 나왔다
빗물 고인 웅덩이로 흘러 들어가
한낮의 오로라를 풀어 놓았다
그는 사이 플라타너스 잎들이
노후된 보닛을 대신하려는 듯
너푼너푼 떨어져 덮어 주었다.
칡넝쿨은 바퀴를 바닥에 단단히 얽어매고
튼실한 혈관으로 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햇빛과 바람, 풀벌레와 별빛이 수시로
깨진 차창으로 드나들었다
고라니가 덤불을 헤쳐 놓으면
그 안에서 꽃의 시동이 부드럽게 걸렸다
저 차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식물성 공업사에 수리를 맡긴 것이다
그래서 소음과 매연과 과속으로 탁해진
그동안의 피를 은밀히 채혈하고
자연수리법으로 고치는 중이다
풀잎 머금은 이슬로 투석마저 끝마치면
아주 느린 속도로 뿌리가 생기고
언젠가는 차의 이곳저곳에 새들도 합승해,
홀연 질주 본능으로 기슭을 배회하다가
봄으로 감쪽같이 견인될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효율성 좋은 자동차라고
차 문을 열거나 지붕 위에서 뛰기도 하지만
계절의 시속으로 함께 달리는 중이라는 걸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금도 차 주위로
푸릇한 수만 개의 부품이 조립되고 있다

-이주송 시집 ‘식물성 피’ 중

버려진 자동차마저 품어 살리는 게 자연이다. 시는 이 진실을 쉽고 생생하게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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