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투사 불리던 그들, 왜 귀족노조가 되었나
유형근 지음
산지니, 512쪽, 3만5000원
“울산 대공장 노동자들은 한때 ‘골리앗의 전사’로 불리며 민주노조운동을 견인해가는 투사들로 칭송받다가,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본가와 담합하는 ‘귀족’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에는 자기들끼리 공장 안에서 똬리를 틀고 미래 전환을 가로막는 기득권 세력의 표상처럼 취급되고 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계급에 대한 인식 변화를 압축하는 문장이다. 그동안 노동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유형근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의 책 ‘분절된 노동, 변형된 계급’은 이 궁금증에 답한다.
책은 울산 대공장 노동자들의 생애와 노동운동을 통해서 한국 노동자들이 지난 40년간 거쳐온 변화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 책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건 울산의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소속 생산직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한국 대표 공업도시’이자 ‘노동운동의 메카’로 불려온 울산의 핵심부 노동자층이다.
책은 울산 대공장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이 빠르게 ‘변형’됨으로써 1987년 이후의 동질적 계급 상황이 이질화되고 노동의 ‘분절’이 가속화되었음을 밝힌다. 1987년 대투쟁 당시만 해도 직영과 하청은 동료의식이 강했고 함께 싸웠다. 그 결과로 노조들이 앞다투어 만들어졌고 노동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사내하청이 고용 유연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자본의 이중적 고용관리 전략이 본격화되면서 사내하청과 정규직의 동료 정체성은 빠르게 사라졌다.
특히 노조 설립이 노동자 연대의 약화로 이어졌다는 분석은 주목할 만하다. 노조 설립 이후 노동운동이 단위 사업장 중심의 임금인상 투쟁으로 재편되고 고용 안정에 치중하게 되면서 노동의 분절, 노동자의 이중계급화를 외면하거나 승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98년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무급휴직 1636명을 포함해 총 6494명의 인원 감축이 있었다. 이런 일을 겪으며 2000년대에 들어와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 활동의 최우선 목표로 고용 안정을 내세웠다. 대표적 결과물이 2006년 6월 노사간 체결된 ‘완전고용보장합의’였다.
신기술 도입이나 자동화 등 정규직 고용이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하청과 신규 작업을 정규직에게 돌려 고용을 보장하기로 한 이 합의는 정규직 노조가 사내하청 노동자를 고용안정을 위한 완충장치로 인식하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암묵적으로 용인돼온 기업내 이중노동시장이 제도화됐고,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연대에 선을 그었다.
저자는 1987년을 거치며 ‘형성’된 한국 노동계급은 노조 설립을 통해 ‘조직’되었으나, 1990년대 이후 ‘변형’되었다고 요약한다. 그 변형이란 노동자들의 성향이 ‘연대적 집단주의’에서 ‘도구적 집단주의’로 바뀌었음을 말한다. 도구적 집단주의는 노동자 집단행동이 노동계급 연대가 아니라 개인의 경제적 지위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성향을 가리킨다.
저자는 임금과 복지가 향상되면서 울산 노동자들이 중산층화되었고, 이런 생활세계의 변화가 도구적 집단주의를 강화했다는 점도 짚어낸다. 현대차 남성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반복 작업으로 특징되는 ‘공장의 세계’와 골프 치고 외식 하는 중산층 생활양식을 가진 ‘생활의 세계’ 사이의 문화적 간극에 노출되었다. 이 간극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족의 계층적 상승이라는 목표에 복무하는 가장으로 규정하면서 임금과 복지, 고용 등에 주력하는 집단행동 성향을 강화했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지역신문 보도 분석을 통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울산 노동자들의 집단행동 궤적을 그려내는데, 대공장 노조에서 2010년 이후 지역과 국가 스케일의 저항이 사라지고 사업장 내 이슈에 몰두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또 지난 15년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저항행동이 크게 늘어났음도 확인된다.
저자는 “오늘날 두 개의 구분되는 노동운동 세대가 병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울산에서 (제조업 대공장 중심) ‘1987년 세대’ 노동운동의 집합행동 빈도는 감소했거나 온건화·규격화된 반면에, (비제조업·비정규직 중심) ‘1998년 세대’ 노동운동이 집합행동의 장에서 그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새로 등장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한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주도 세력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노동자들이 다시 계급으로서 재형성될 수 있을까.
책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비정규직 투쟁이 활발해졌지만 지금까지 원하청 연대를 통한 사내하청 노조운동의 성공 사례는 최소한 금속산업의 제조공장에서는 부재하다. 이 실패는 흔히 원하청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 실패로 분석돼 왔다. 하지만 저자는 연대를 어렵게 하는 구조적 한계를 지적한다. 사내하청운동은 정규직 노조와 대표성이나 이익에서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악순환이 이대로 지속되면 노동계급의 파편화 또는 해체의 단계에 접어들게 될 것”이라면서 “문제는 언제나 당대의 분절된 노동의 조건 속에서 연대와 단결의 형식을 재구성하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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