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인파 대응 매뉴얼 없다"더니...2005년부터 있었다

나운채, 김남영 2022. 11. 3.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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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이미 2005년부터 ‘다중운집 행사 안전관리 매뉴얼’을 운영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3일 임호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이 문건은 지난 2005년 10월 초판이 발행됐고, 2006년 5월 2판에 이어 2014년 8월 3판이 발행됐다. 발행처는 경찰청 경비과로, 외부 유출이 금지된 문서다.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 수록돼 있다는 이유와 함께 경찰관 교육 및 직무수행 지침 외에는 열람 및 전파, 사용을 금지한다고 했다.

2014년판 매뉴얼에는 “다수의 인파가 모이는 행사에선 사소한 계기에 의해서도 급박한 혼란 상태가 발생하거나 사망자 발생 등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경찰은 매뉴얼에는 ‘다중운집’의 개념을 “미(未)조직된 다수의 군중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는 축제, 공연, 체육경기, 행사 등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 “정부·민간, 옥내·옥외, 국내·국제, 수익·공익성 여부를 불문한다”는 단서까지 붙여놨다.

지난달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해밀톤 호텔 부근 도로에 시민들이 몰려 있다. 이날 핼러윈 행사 중 인파가 넘어지면서 다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자제공. 연합뉴스

매뉴얼은 이러한 다중운집 행사의 안전관리에 대해 “각종 행사를 위해 일시에 모인 군중에 의해 발생될 수 있는 자연적·인위적 혼란 상태를 사전에 예방·경계하고, 위험한 사태가 발생한 경우에는 신속히 조치해서 피해가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는 경찰 활동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또 “국민의 공공안전과 직결되는 다중운집 행사 안전 관리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며 “경찰도 본연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유관기관과의 협업을 한층 더 강화해 나가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특히 매뉴얼은 이런 다중운집 행사의 위험성을 기준으로 경찰 개입 여부 및 그 수준을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전사고 및 범죄·테러·행사 방해·집단 충돌 등 여러 요소와 교통 혼잡·교통안전 위협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행사 위험성을 판단해서 경찰 인원 배치 및 행정지도 등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거대 인파가 운집하거나 극단적으로 혼잡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엔 지하철 입구 등에 경찰 인원을 선점 배치해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인파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경찰관이나 시설물로 안전 공간·통로를 확보해야 한단 내용이 매뉴얼에 담겼다. 이를 위한 법적 근거로 매뉴얼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과 함께 경찰법, 경찰관 직무집행법, 도로교통법 등을 나열했다. 경찰은 국민의 생명과 신체 및 재산 보호, 교통안전 확보 등을 임무로 수행한단 취지다.

지난달 30일 인명 사고가 발생한 서울 용산구 이태원 사고현장에서 소방구급 대원들이 현장을 수습하고 있는 모습. 우상조 기자

그러나 이태원 참사 당시 경찰의 이런 준비된 행동을 보이지 못했다. 사고 당일 13만명의 인파가 이태원 일대로 몰렸지만, 경찰 투입 인력은 137명이었다. 이마저도 안전 관리보단 마약 단속에 초점이 맞춰졌다.

경찰은 이 매뉴얼에서 다중운집 국내외 안전사고 사례를 소개했는데, 이 중에선 지난 2005년 8월 31일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시아파 순례객들이 성지 순례 중 “다리 위에 자폭 테러범이 있다”는 소리에 놀라 서로 밀치면서 도망가다가 900여명이 숨지고, 400여명이 다친 사례가 있다고 담았다.

경찰은 그동안 주최 측이 있는 행사는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행사 관리의 1차 책임이 주최 측에 있는데 이태원 참사의 경우 소상공인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연 행사’여서 적극적으로 나설 여지가 불분명했단 점을 강조했었다. 경찰청 관계자는 지난달 31일 브리핑에서 “주최 측이 없는 인파 사건에 대응하는 매뉴얼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정작 이 문건에선 다중 운집 행사의 주최가 있는지 없는지를 특별히 구분하고 있지 않다. 경찰청 관계자는 “이태원 참사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둔 매뉴얼이 아니다”라며 “내부 참고용 문건이라 별 의미가 없고 지금은 경찰도 행안부의 지역축제장 매뉴얼에 따른다”고 말했다. 경찰청은 이와 관련해 “매뉴얼은 다중운집 행사로 위험을 유발하는 자인 ‘주최자’가 1차적인 책임을 진다는 ‘행사 주최자 책임’을 대원칙으로 삼고 있다”며 “관계부처와 적극 협의해 조속한 시기에 주최자 유무와 관계없는 '인파관리 매뉴얼'을 개발하겠다”고 알렸다.

지난 2015년 10월 경찰청의 연구용역으로 대구카톨릭대학교 산학협력단이 발행한 ‘다중운집 행사 안전관리를 위한 경찰 개입 수준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선 일본 오사카 사례를 들며 “행사주최가 불분명한 다중운집 상황, 매년 특정 장소에 신년 카운트다운을 위해 젊은이가 자연적으로 운집하는 경우엔 관할 경찰서장이 책임 하에 사건사고 방지를 위한 활동계획을 자체적으로 수립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번 참사 사상자 대다수는 10~20대 젊은 층으로, 이들은 핼러윈을 맞아 이태원을 찾았다가 변을 당했다.

연구진은 이 사례와 함께 “행사의 유형과 주체에 관계없이 위험성의 판단과 관리 및 감독을 담당하는 것은 안전전문가인 경찰의 임무”라며 “행사의 위험성 진단과 감독은 경찰의 역할이며, 모든 행사 시 경찰이 점검해야만 하는 필수사항으로 구분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청년정의당·청년진보당·청년녹색당 등 청년 당원들과 청년하다·진보대학생네트워크 등 청년 단체가 모여 결성한 이태원 참사 청년 추모행동 관계자들이 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인근에서 희생자를 추모하고 참사를 막지 못한 정부를 규탄하는 침묵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운채·김남영 기자 na.unch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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