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Fed, 4회 연속 자이언트 스텝…'천천히 그러나 높고 길게' 간다
지친 기색은 없었다. 쉼 없이 긴축 가속페달을 밟아온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여전히 강경했다. 4회 연속으로 거인의 발걸음(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인상)을 옮긴 2일(현지시각)에도 “갈 길이 남았다(some ways to go)”고 했다.
가속 페달을 누르는 발의 힘은 조금 빼겠지만, 이전보다 더 높은 금리를 더 오래 가져갈 뜻도 밝혔다. 긴축 속도전에 숨 가빠하는 시장의 분위기를 반영하면서도 목표는 수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함께 전한 것이다. Fed가 긴축의 종착점을 더 멀리 옮기며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도 더 커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1~2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연 3.75~4%로 0.75%포인트 인상했다. 4회 연속 자이언트 스텝이다. 이날 Fed의 자이언트스텝 인상은 상수였다. 관건은 향후 금리 인상 방향과 강도였다. 시장이 파월의 입을 주시한 이유다.
파월의 메시지는 '천천히 그러나 높고 길게(Slower but Higher & Longer) 이어지는 긴축'으로 요약된다. 4회 연속 자이언트 스텝처럼 급하게 가속 페달을 밟지 않는 대신, 물가가 잡힐 때까지 더 오래 고금리를 견뎌야 한다는 취지다. 파월 의장은 이를 인상 속도와 인상 수준, 지속 기간 등의 문제로 요약했다.
파월은 인상 속도에 대해서는 “늦춰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쉼 없이 가속 페달만 밟아온 긴축이 경제에 미칠 영향 등을 점검하기 위해서라도 감속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다만 인상 수준과 지속 기간에 대해서는 매의 발톱을 감추지 않았다.
파월은 “적절한 금리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기에는 갈 길이 제법 멀다”며 “지난 9월 회의 이후 노동시장 통계 등은 (향후) 최종 금리가 이전에 예상했던 것보다 높을 것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지난 9월 FOMC 이후 발표한 점도표상 최종 금리인 연 4.6%(중간값)보다 더 높은 수준인 연 5%까지 금리가 올라갈 수 있다는 취지다.
파월은 조기 긴축완화 등 이른바 'Fed 피벗(pivot·입장 선회)' 기대에도 “금리 인상을 중단하는 것은 매우 시기상조”라고 일축했다. 시장의 '희망 회로' 돌리기나 '긴축 대오 흔들기'에 강하게 선을 그은 것이다.
Fed가 다음 달 FOMC에서 추가 자이언트 스텝을 밟을 가능성은 작아졌다. 주요 투자은행(IB)들도 빅스텝(0.5%포인트 인상)을 전망하고 있다. 다만 파월의 힌트에 최종금리 수준은 종전보다 높여잡고 있다. 씨티그룹은 Fed의 최종 금리 수준을 연 5.25~5.5%(종전 연 5~5.25%)까지 제시했다.
투자관리회사 페더레이티드 에르메스 스티브 치아바론 시니어 매니저는 블룸버그에 “이번 결정은 ‘악마의 흥정(devil‘s bargain)’”이라며 “금리 인상 폭은 작아지겠지만, 최종 금리 수준은 높아질 것이고, 이는 소폭 인상의 횟수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의미인 만큼 결코 비둘기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짧고 굵게 맞을 것이냐, 약하고 길게 맞을 것이냐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시장은 파월의 입에 롤러코스터를 탔다. 긴축 속도 조절 기대감에 스탠더드 앤 푸어(S&P) 500지수는 1%가량 오르다 파월의 매파적 발언에 전날보다 2.5% 하락한 채 장을 마쳤다. 다우존스 지수(-1.55%), 나스닥 지수(-3.36%) 등도 일제히 하락했다.
시장의 기대를 깨버린 건 과잉 긴축이 과소 긴축보다 낫다는 판단 때문이다. 긴축 고삐를 조이다가 빨리 풀었다가 물가가 잡히지 않았던 1970년대의 '스톱앤고(stop and go)' 트라우마다. 파월은 “과잉 긴축을 한다면 Fed는 경제를 부양시킬 도구를 갖고 있다”며 “가장 큰 위험은 금리를 충분히 올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가만큼 뜨거운 노동시장도 고민이다. 미국의 9월 실업률은 3.5%로 전달보다 0.2%포인트 낮아졌다. 지난 50년 내의 최저 수준이다. 임금과 물가가 서로를 밀어 올리며 고물가가 장기간 이어질 수 있다.
Fed의 속도조절론에 반색하는 금융시장도 불안요인이다. 한국 국제금융센터는 “(시장이 기대하는) 금리 인상 속도 조절 가능성을 최종 금리의 상향조정 시사로 상쇄해 금융시장의 과도한 정책전환 기대를 억제했다”고 평가했다.
FOMC 결과를 받아든 한은의 고민도 커졌다. Fed의 최종 금리 수준이 오를 경우 한은도 긴축의 종착 지점을 바꿔야 한다. 지난 9월 이 총재가 쓴 표현대로 “전제 조건이 바뀐” 것이다. 이 총재가 지난달 밝힌 한은의 금리 종착점은 연 3.5% 수준이다.
메리츠증권 윤여삼 연구원은 “이 총재의 발언이 무색하게 국내 기준금리 기대도 다시 높아질 공산이 커졌다”며 “내년 1분기 기준금리가 연 3.75%까지 인상할 가능성 열어둬야 한다”고 예상했다.
미국이 거인의 발걸음을 내디디며 한국 기준금리(연 3%)와 미국의 금리 격차는 다시 1%포인트로 벌어졌다. 양국 중앙은행이 예상하는 시나리오대로 Fed가 기준금리를 연 5%까지 올리고, 한은이 기준금리를 3.5%까지 올릴 경우 한·미 금리 차는 1.5%포인트로 벌어진다. 2000년 5~9월 기록한 최대 역전 폭(1.5%포인트)과 같다.
금리 차가 벌어지면 외국인 자금유출 등의 원화가치 하락 등의 부작용이 올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4분기 기준 한·미 간 적정 기준금리 차이는 최대 1.12%포인트다.
당장 오는 24일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금리 인상은 상수지만 빅스텝과 베이비스텝(0.25%포인트) 인상 사이에서 선택지가 나뉘게 됐다. 한·미 금리 차, 물가 등은 빅스텝 요인이지만, 경기 둔화와 금융시장 불안 등은 베이비스텝 요인이다. 금통위원들 간의 의견이 팽팽히 나뉘며 이 총재가 최종 결정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증권사마다 빅스텝과 베이비스텝 등의 전망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한국 경제는 더 힘든 가시밭길을 걷게 됐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원화가치 하락)의 '3고(高)'의 파고는 더 높아지고 있다. 미국이 돈줄을 죄며 강달러 현상도 이어지게 됐다. 파월은 “미 달러 강세는 일부 국가에 도전 과제”라며 “미국 물가 안정이 장기적으로 세계 경제에 좋은 일”이라고 밝혔다. 자국 물가 잡기를 위해 강달러를 용인하겠다는 취지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1973년=100)는 2일(현지시간) FOMC 직후 110선까지 떨어졌다가 파월의 매파 발언이 쏟아진 직후 단번에 112선까지 치솟았다. 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가치는 전날보다 6.4원 내린(환율 상승) 달러당 1423.8원에 거래를 마쳤다.
수출 전선도 험난해졌다. 한국의 주요 수출국인 미국이 경기 침체에 빠질 가능성은 더 커졌다. 파월은 “연착륙으로 가는 길이 좁아졌다”고 말했다. 채권 금리가 오르고, 시중 유동성이 마르며 기업들의 자금조달도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은 최근 '돈맥경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3일 한국 국채 3년물 금리는 전날보다 0.063%포인트 오른 연 4.158%로 장을 마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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