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서 긴급성 읽어라" 이 매뉴얼, 그날 11번 신고엔 무용지물
'최초로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긴급성 여부를 정확히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은 유능한 112 접수 요원의 필수 요건'.(112 신고 접수·지령 매뉴얼)
경찰이 112 신고 접수 단계에서 최초 신고자의 긴급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해왔지만, 지난달 29일 이태원 참사 신고 접수 당시 해당 매뉴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 발생 전 신고자들이 “심각하다”, “사람이 죽을 것 같다”라며 11차례 신고를 했지만, 이를 접수한 경찰은 ‘코드0’(최단 시간 내 출동)을 1건만 발령했다.
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112 신고 접수·지령 매뉴얼’에 따르면 경찰은 112 접수 요원에게 직관적 상황 판단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매뉴얼은 신고자의 첫소리에 담긴 의미와 맥락 파악을 위해 ▶소음 ▶ 신고자의 목소리 ▶신고자의 언급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신고자의 비명과 다급하거나 격양된 목소리는 긴급성을 판단하는 최우선 지표로 분류됐다. 신고자의 ‘살려달라’, ‘도와달라’, ‘빨리요’라는 절박한 목소리도 긴급성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였다.
경찰이 지난 1일 공개한 11건의 이태원 참사 전 112 신고 녹취록에는 사안의 긴급성을 드러내는 다급한 목소리가 다수 담겨있었다. “사람들 지금 길바닥에 쓰러지고 사고 날 것 같다. 위험하다”(오후 8시 33분 신고), “사람들이 압사당하고 있어요”(오후 8시 59분 신고), “대형 사고 나기 일보 직전”(오후 9시 신고), “진짜 사람 죽을 것 같아요”(오후 9시 2분 신고), “지금 되게 위험한 상황인 거 같아”(오후 9시 51분 신고)와 같은 다급한 신고 전화가 112상황실로 쏟아졌다. 녹취록에는 전화 당시 신고자 주변의 비명과 혼란한 상황도 함께 담겼다. 경찰은 당시 11건의 신고 중 오후 9시 신고 내용만 코드0으로, 7건은 ‘코드1’(우선 출동)으로 분류했지만 이마저도 출동하지 않았다.
경찰은 2012년 피해자의 신고를 받고도 신고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늑장 출동했던 ‘오원춘 사건’ 이후 112 접수 요원의 직관적 판단 능력을 강조해왔다. 경찰은 매뉴얼을 통해 “‘오원춘 사건’ 당시 신고자의 목소리를 들은 112 요원들이 ‘가정폭력 같다’고 언급한 것은 한편으로는 소리를 통한 상황 파악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했다. 실제 매뉴얼엔 112 접수 요원이 선입견을 배제하고 신고자 전화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놓치지 말고 상황 파악을 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경찰청 특별수사본부는 이날 참사 당일 서울경찰청 상황관리관으로 근무했던 류미진 총경을 업무 태만 사유로 수사 의뢰하는 등 112 신고 접수와 상황 판단의 적절성에 대해서도 수사에 나섰다.
이창훈 기자 lee.changho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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