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 슬픔이 깊어 분노할 힘조차 없다

소종섭 2022. 11. 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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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애도하는 마음인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폴리스라인이 처져 있다는 것 외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골목길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다.

슬픔이 깊어 분노할 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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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참사 추모 공간에 시민들이 놓고 간 추모의 꽃과 메시지가 놓여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도 사진을 찍지 않았다. 20대도 있었고 50대도 있었다. 여성이 있었고 남성이 있었다. 외국인도 드물지 않게 눈에 띄었다. 흑인도 있었고 백인도 있었다. 누군가는 절을 했고 누군가는 합장했다. 대부분은 묵념했다. 공통분모는 흰 국화꽃. 추모하는 마음으로 손에 든 하얀 국화꽃을 매개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로 연결됐다. 대기하는 줄은 추모객이 몰리면 두 줄이 됐다가 줄어들면 다시 한 줄이 되기를 반복했다. 문득 순식간에 생사가 엇갈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삶과 죽음은 친구였다. 가까이 있었다.

지난 2일 오후 6시,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참사 추모 현장을 찾았다. 역 입구에서부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경찰관 한 명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통 속에 담겨있는 국화꽃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린 뒤 꽃을 바쳤다.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딸이고 아들이었을 그들에게 뒤늦게라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었다. 바로 앞에 있던 젊은 여성은 묵념을 한 뒤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더니 눈물을 훔치며 현장을 떠났다. 순간 내 가슴에도 큰 파도가 일었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애도하는 마음인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어쩌면 기성세대로서 느끼는 자책감 같기도 했다. 국화꽃의 바다 속에서 스님들의 독경 소리만이 침묵을 깨고 있었다.

참사 현장인 좁은 골목을 한참 바라보았다. 보도를 통해 접한 당시 상황이 마치 그림처럼 정지된 화면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현장치고는 너무나도 평온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에 도심 한복판인 바로 저곳에서 156명이 희생됐단 말인가. 폴리스라인이 처져 있다는 것 외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골목길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슬펐다. 깊은 무력감과 허탈감이 밀려왔다.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포스트잇에 쓴 글들을 읽어보았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너무나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하늘 위에서 큰 위로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 번의 참사를 겪은 세대로서 화가 나기보다 무력합니다. 유가족들과 친구, 지인들이 많이 고통스럽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생에는 행복하게 살고 꽃처럼 됐으면 좋겠어요.”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세요. 살아있는 사람이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라고 쓴 사람들이 참 많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가슴 속에 또 돌덩이 하나를 품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에 이은 두 번째 참사의 기록을 새기게 됐다. 특히 희생자들 대부분의 동년배인 2030세대에게 이태원 참사는 인생 내내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참사’는 하나의 사고가 아니라 시대의 키워드가 됐다. 어버이세대의 한국전쟁, 386세대의 민주화운동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문명화된 대한민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가는가는 우리 사회의 미래와도 관련이 깊다.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위한 입법 등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 발 나아갈 수 있다. 이에 앞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진정성과 공감이다. 그런데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 일부 인사들은 오히려 화를 돋우고 있으니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슬픔이 깊어 분노할 힘조차 없다. 내일은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소종섭 아시아경제 편집국장

소종섭 정치사회부문에디터 kumkang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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