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란의 역사책방] 美 남북전쟁은 채권전쟁이었다

2022. 11. 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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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전비 조달 핵심 이슈
채권 발행 따라 전쟁 승패 결정
남부 투기 조건 면화 채권 발행
전쟁 상황 따라 가격 출렁
채권 성공 위해 노력했지만
면화 생산지마저 뺏겨 결국 패배

미국은 건국 이후 북부의 산업 자본주의와 남부의 면화 농업이라는 서로 다른 경제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부는 기계에 투자했고, 남부는 노예에게 투자했다.

보호무역이 필요한 북부의 산업자본은 수입관세를 부과했고, 수출 위주의 남부는 자유무역을 지지했다.

북부는 이른바 아메리카 시스템을 만들어 가면서, 부의 70%, 은행자산의 80%를 차지했다. 남부는 비록 노예제라는 후진적 경제시스템에 속했지만, 남부의 농장주는 그 어떤 부자보다 부유했다. 면화경제는 미시시피 삼각주부터 뉴욕의 은행, 유럽의 방적공장과 금융기관을 아우르는 세계 체제였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 남북전쟁(1861~1865)도 전쟁 비용의 조달이 핵심 이슈였다. 전쟁의 재정적 비용은 대략 52억달러로 추산된다. 세금을 거두는 것이 물론 첫 번째 해법이다. 북부는 실제 처음으로 소득세를 부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세금으로만 전비를 마련할 수는 없다. 전쟁 시 세금보다 채권 발행이 일반적이다. 북부와 남부 모두 지폐와 채권을 발행했다. 전비를 마련하기 위한 남부와 북부의 채권 발행 성공과 실패가 전쟁의 승리와 패배를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처음에 북부는 국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뉴욕의 은행들이 국채 매입에 협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861년 12월28일에 뉴욕의 은행은 정부에 금의 지불을 중단하고 국채 매입의 약속도 이행하지 않을 것을 통보한다. 어찌 보면 뉴욕 은행의 반란과도 같은 선언이었다. 그 뒤에는 남부의 면화가 필요한 영국과 로스차일드 은행이 있었다. 북부와 달리 남부와 영국이 이해가 같았을 뿐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채권왕 제이 쿡(1821~1905)이 등장한다. 남북전쟁에서 북부의 지지자이자 오랫동안 노예제를 반대했던 쿡은 곧 연방을 위한 자금 조달에 참여한다. 남북전쟁 전날 필라델피아에서 사업을 시작한 쿡은 채권 판매의 대리업무를 맡는다. 위기의 상황에서 체이스 재무장관은 쿡에게 전권을 허락한다. 쿡은 전비의 70%를 채권 발행으로 조달했다.

쿡은 채권 마케팅을 완전히 혁신했다. 쿡은 금융기관이 아니라 개인에게 채권을 팔았다. 그는 2500명의 판매원을 고용해 전국을 집집마다 누비며 5억달러의 국채를 팔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북부는 쿡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 그는 1861년에 1억달러 채권 발행의 4분의 1을 매각했지만, 2년 후에는 5억달러 발행의 80%를 매각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쿡의 판매원은 하루 평균 250만달러의 채권을 팔았고 이 속도는 전쟁이 끝날 무렵 가속화됐다. 쿡은 총 10억달러 상당의 채권을 매각했다. 그는 채권 판매로 대략 100만달러를 벌었다.

1861년 연례 연설에서 링컨이 바랐던 희망처럼 미국 시민이 전쟁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채권 판매 방식에 대한 쿡의 혁신은 남북전쟁의 성패를 갈랐을 뿐만 아니라 미국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연방 국민의 5%를 소자본가로 변모시키고, 침대 매트리스 밑에 죽어 있던 자본을 해방시켜 생산적으로 소비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남부는 북부에 비해 전반적으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건전하지 않았다. 지폐의 무분별한 인쇄는 남부와 북부 모두 전시 금융의 특징이었지만 남부에서는 훨씬 더 두드러졌다. 화폐의 가치는 절하되고 물자 부족은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 지폐와 금화의 가치 격차를 확대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방채권을 남발해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비상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금융방법 중 하나는 ‘에링거’ 대출이라고도 알려진 1863년 발행된 면화채권이다. 독일의 은행가인 에링거가 루지애나 상원의원이자 외교관이었던 존 슬라이델에게 제안해서 발행됐다. 이후 두 사람은 장인과 사위 관계로 맺어졌다.

면화채권은 면화를 담보로 발행된 1500만달러의 채권이다. 면화채권은 국채로 발행된 최초의 파생 금융상품이었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남부는 채권 흥행이 절박했고, 흥행을 위한 채권의 조건을 금융인인 에링거가 만들었다.

우선 투자자에게 금화로 7% 쿠폰을 지급해야 했다. 반면 투자자는 투자금을 7개월에 걸쳐 분할 납부했다. 당장 필요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은 아니었다. 이는 남부 채권이 19세기 투기채권 발행의 조건으로 발행되기 때문이다. 흥행을 성공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유럽 투자자들이 면화채권을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곧 남북전쟁의 상황에 따라 채권 가격은 출렁였다.

그런데 채권 가격이 하락할 때마다 남부 정부는 가격을 방어하기 위해 환매, 곧 면화채권을 사들였다. 1863년 중순까지 발행된 채권의 절반 이상을 남부가 대리인을 통해 환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전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왜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했을까.

투자자가 할부로 지불할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투자가 이루어지기 전에 가격이 폭락했다면 투자자들은 손실을 받아들이고 채권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남부는 항상 채권의 성공을 위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지킬 수 없는 약속도 있었다. 면화는 바다 건너 남부에 있었고, 남부가 배달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전쟁 과정에서 북부군은 남부의 면화 생산 및 수출 요충지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결국 남부는 전쟁에서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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