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지금 여기 _요주의여성 #73

김초혜 2022. 11. 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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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와 양자경을 찬양함.
〈엘르〉 미국 11월호 커버를 장식한 양자경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스틸
이 영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엘비스처럼 차려입은 젊은 동양인 여성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가운데, 이에 맞서 양자경이 이마에 ‘장난감 눈알’을 붙이고 쿵푸를 한다? 혹은 제이미 리 커티스와 양자경이 소시지 손가락으로 서로를 애무하며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이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이토록 가늠하지 못한 채 영화를 본 적이 있었던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란 부제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아니라 이 작품에 붙여 마땅합니다. 제목부터 몇 번이고 고쳐 말하게 만드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년의 이민자 여성 ‘에블린’은 어느 날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주인공임을 알게 되고, 다중우주의 수많은 ‘나’와 접속하며 그들의 능력을 통해 악당 ‘조부 투바키’에 맞서게 됩니다.

SF 판타지, 쿵푸 액션, B급 코미디에 가족 드라마와 러브 스토리까지 더해진 이 소란하고 기상천외한 영화의 중심에는 양자경(영어 이름 Michelle Yeoh)이 있습니다. 올해 만 60세 생일을 맞이한 양자경은 중국계 말레이시아 출신. 1980~90년대 홍콩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액션 스타로 이름을 알린 그는 할리우드에 진출했고 〈007 네버 다이〉 〈와호장룡〉 〈게이샤의 추억〉 〈스타 트렉: 디스커버리〉 등 작품을 이어가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시안 배우로 자리 잡았습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처럼 최근 동양계 배우들이 중심이 된 프로젝트에서 양자경의 존재감과 카리스마는 분량 그 이상의 역할을 했지요.

작품에서 주로 강인하고 위엄 있는 스승 혹은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했던 양자경은 2018년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프레스 투어 중에 〈에에올〉 대본을 받았습니다. 나만이 할 수 있고, 오직 나를 위해 쓰여진, 마음 깊은 곳에서 늘 기다리던 그런 작품임을 직감했지만 동시에 본인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위험하고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기도 했죠. 결국 두 감독(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의 비전을 이해하고 도전하기로 결심한 양자경은 ‘에블린’이 차이나타운에 있을 법한 아주 평범한 여성처럼 보이길 원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그동안 간과되어온 엄마, 아줌마,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전하길” 바랐습니다. 미국 ELLE.com과 나눈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동양계 이민자 여성이 슈퍼히어로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본 적 있나요? 에블린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에 충분한 사람이에요.”

피로에 지친 푸석푸석한 얼굴의 에블린부터 멀티버스 속 다양한 버전의 ‘나’로 변신하는 양자경을 보자면 그야말로 이 영화는 ‘양자경의 모든 것’이 담긴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우먼 인 할리우드’ 이슈로 참여한 〈엘르〉 미국 인터뷰에서 그는 요즘 전과 달리 어느 곳에 가든 젊은 팬들이 다가와 말을 건네고 “쿨하다”고 떠받들어 준다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스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스틸
처음부터 끝까지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버무린 영화는 곱씹게 되는 여러 은유와 상징, 메시지를 남깁니다. 말하자면, 극 속에서 사람들은 평행우주 속 다른 ‘나’와 접속하려면 이상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더더욱 맥락이 안 맞고 이상한 행동을 할수록 더 먼 평행우주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설정은 극 속에서 엄청난 코미디를 유발하는 장치이면서 ‘도전’에 대한 메시지를 주기도 하죠. 우주를 위협하는 악당 ‘조부 투바키’가 바로 에블린의 딸 조이와 연결되어 있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때때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수많은 엄마와 딸, 부모와 자식 관계가 겹쳐지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이 비범한 영화가 남기는 가장 큰 메시지는 “지금 이 순간, 서로에게 다정하자”라는 것. 내가 왜 사는지, 지금까지 이룬 것은 무엇인지, 과거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지. 누구나 이따금 한번씩 이런 질문들이 떠올라 밤잠을 설치거나 여러 날 침잠하기도 합니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길을 잃고 허우적대는 기분에 휩싸이기도 하죠. 그럴 때, 과연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에에올〉의 결말부이자 하이라이트에서 에블린은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생각했던 남편 웨이먼드(배우 키 호이 콴)의 방식대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적들에게 펀치를 가하는 대신 그들의 마음을 달래고 채워주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베이글 구멍’으로부터 마침내 조부 투바키를 구해내고 딸 조이를 향해 외칩니다. “난 너와 여기 있고 싶어!”

인생의 허무를 달래고 서로를 굳건하게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 마주 잡은 손이라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순간이라는 것. 너와 내가 함께 하는 “한 줌의 시간”을 소중히 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의미라는 것. 깔깔깔 웃다가 눈물짓고 마는 영화 〈에에올〉에 담긴 이야기를 오래도록 곱씹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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