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율이 왜 오르지?”…노무현은 세 번 물었다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5〉 한미 FTA 비준, 길고 긴 여정
김영주 산업자원부 장관에 이어 박홍수 농림부 장관이 보고했다. 노 대통령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속으로 조마조마했다. 정부 직제상 뒷순위였던 김성진 해양수산부 장관의 차례였다. “명태와 민어 어업에 엄청난 피해가 우려됩니다.” 노 대통령이 물었다. “명태잡이 어민이 몇 명입니까.” 김 장관이 답했다. “원양은 700명 정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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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태 어민 700명이 어업 큰 피해?”
시범 케이스로 해수부 장관 질책
이정우 등 FTA 공개 반대에 난감
임기 내 비준안 국회 처리 무산돼
」
바로 불똥이 떨어졌다. 노 대통령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700명을 갖고 어업계의 큰 피해라고 보고합니까. 이런 안이한 자세로 국회 비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과장된 피해 보고는 그만하고 경쟁력 강화 대책에 집중하세요.” 평소 노 대통령에게선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썰렁한 분위기에서 회의가 끝났다.
내 잘못이 컸다. 노 대통령에게도, 김 장관에게도 미안했다. 나는 노 대통령이 한미 FTA에 얼마나 노심초사하는지 알고 있었다. 특히 지지자들의 반대를 힘들어했다. 그는 장·차관들이 앞장서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하길 바랐다. 그런데 상황은 거꾸로 갔다. 각 부처는 피해 규모를 부풀렸다. 피해지원용 예산 따내기 경쟁을 벌였다. 장관들의 보고에 노 대통령이 답답해할 만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 둔 건 내 잘못이었다. 미리 각 부처에 경쟁력 강화 대책을 중점 보고하라고 전달했어야 했다.
4월 12일 2차 워크숍을 열었다. 나는 회의에 앞서 노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김 장관이 야단을 맞은 게 신문에도 나고 장관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해명 겸 격려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노 대통령도 불쑥 화를 낸 게 미안했던 것 같다. 회의 모두발언에서 김 장관에게 사과했다. “지난번엔 나 때문에 피해를 보게 해서 미안합니다.” 김 장관은 별일 아니란 듯이 응수했다. “학생이 공부 잘하라고 질책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노 대통령은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사과했다. “해수부 장관은 중소기업청장 때 일을 열심히 하고 좋은 성과를 내서 장관으로 발탁되신 분입니다. 난데없이 벼락을 맞게 해서 미안합니다.”
“어공만으로 청와대 안 굴러갑니다”
노 대통령은 왜 김 장관에게 두 번 사과했을까. 개인 성품도 작용했지만 다른 사연도 있다. 김 장관은 ‘늘공(직업 공무원)’의 대표 주자다. 2003년 봄, 노무현 정부 출범 초기의 청와대는 이른바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채워졌다. 실장·수석급만 그런 게 아니었다. 비서관과 행정관까지 모두 정치권에서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당시 대통령 측근들은 직업 공무원인 ‘늘공’을 불신했다. 청와대 경제 참모 중 늘공은 한 명도 없었다. 김영삼이나 김대중 정부 때와는 딴판이었다.
당시 나는 기획예산처 차관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고민이 많았다. 어느 날 기회가 왔다. 이광재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따로 만났다. “어공으로만 청와대를 운영하면 안 됩니다. 정치적 색채가 없는 테크노크라트(전문기술 관료)를 활용해야 합니다. 실무 능력은 늘공이 어공보다 뛰어납니다.” 두 사람을 추천했다.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과 김성진 국장(기획예산처 사회예산심의관)이다. “시범 케이스로 우선 한 명을 청와대에서 써보시죠. 김 국장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김 국장은 2003년 7월 정책관리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얼마 뒤 산업정책비서관으로 옮겼다. 노 대통령은 그의 업무 능력을 눈여겨봤다가 몇 년 뒤 해수부 장관에 발탁했다. 늘공이 대규모로 청와대에 들어가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박봉흠 장관은 이듬해인 2004년 1월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총리 물망에도 올랐다. 하지만 건강 문제(대장암 수술)로 사양하고 정책실장도 아쉽게 물러났다.
이정우·박봉흠과 3자회동서 찬반 격론
다시 한미 FTA 협상 타결 직후다. 노 대통령이 불쑥 말을 꺼냈다. “이상하다. 왜 지지율이 상승하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비슷한 얘기를 했다. 나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아니, FTA를 타결하면 당연히 지지율이 올라가지 떨어질 리가 있나.’
그런데 왜 노 대통령은 반대로 생각했을까. 그만큼 지지자들의 한미 FTA 반대에 노 대통령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 대통령은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지만 정치적으로는 손해를 감수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제 협상을 타결했으니 지지세력이 확 떨어져 나가겠지.’ 그게 노 대통령의 짐작이었다.
한미 FTA 반대론자들은 협상 기간 내내 이렇게 공격했다. “자기편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면서 무슨 협상이냐.” 심지어 청와대 출신도 FTA 반대쪽에 선 경우가 있었다. 초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가 그랬다. 어느 날 청와대 근처 식당으로 이 전 실장을 초청했다. 두 번째 정책실장을 맡았던 박봉흠 전 장관이 자리를 만들었다.
술잔을 앞에 두고 셋이 찬반 격론을 벌였다. 나와 박 전 장관은 간곡히 부탁했다. “대통령을 가까이 모셨던 분이 공개적으로 대통령 정책에 반대하면 되겠습니까.” 이 전 실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다시 말했다. “이것만이라도 들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언론 인터뷰는 하지 말아 주세요.” 이 전 실장은 동의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전 실장의 반대는 두고두고 굉장한 부담이었다.
청와대 직원 중에도 반대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현직이라서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을 뿐이었다. 이 사람들도 설득해야 했다. 당시 ‘상춘포럼’이란 청와대 내부 공부 모임이 있었다. 2006년 10월 25일이다. 내가 강연자로 나섰다. “전 세계가 미국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면 FTA를 꼭 해야 합니다.” 강연 한 번에 그들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했다.
비준안 국회 제출 사흘 뒤 청와대 떠나
한미 FTA 협상 타결 후 시급한 과제는 국회 비준이었다. 노 대통령 임기 만료(2008년 2월 24일) 전 국회 통과가 목표였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사람을 바꿔야 했다. 국회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 정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을 찾아야 했다.
노 대통령에게 두 사람의 교체를 건의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박홍수 농림부 장관이다. 김 본부장은 뛰어난 협상가지만 그 때문에 되레 일부 의원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됐다. 장관급으로는 비교적 젊은 나이(40대)와 유능함이 우리 국회 분위기에선 오히려 단점일 수 있었다. 본인 희망을 존중해 주 유엔 대사로 가게 했다.
후임에는 김종훈 한미 FTA 협상 수석대표가 적임자라고 봤다. 그는 당시 50대 중반의 노련한 외교관이었다. 수석대표로 협상 내용도 꿰뚫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의 세 번째 통상교섭본부장을 맡은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유임됐다. 장관급으로는 드문 경우다.
박 장관은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란 농민단체 출신이다. 농민 지도자로 존경받는 분이지만 농민들의 FTA 반대를 극복하고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임상규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을 추천했다.
미국과의 추가 협의를 거쳐 한미 FTA 비준안을 국회에 제출한 건 2007년 9월 7일이었다. 사흘 뒤 나는 정책실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내 개인 스캔들이 일파만파 커지면서 노무현 정부의 국정 운영이 차질을 빚을 정도였다. 떠나는 게 최선이었다. 노 대통령이 나를 불렀다. “관저 뒷산으로 같이 산책이나 갑시다.” 숲속 벤치에 단둘이 앉았다. 나는 너무 죄송해서 말도 못하고 노 대통령의 위로만 들었다.
그렇게 청와대를 떠나게 되자 한미 FTA에 대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노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FTA 비준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새 정부 들어 상황은 더 나빠졌다. ‘광우병’ 파동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한미 FTA 비준안은 협상 타결 후 4년이 지난 2011년 11월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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