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1학년 딸이 학교에서 '압사 예방법'을 배워왔다

이주영 2022. 11. 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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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무너진 신뢰의 연결고리... 안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해달라

[이주영 기자]

"사람이 많은 데 가면 이렇게 해야 한대."

잠자리에 누워 재잘재잘 떠들던 초등학교 1학년 딸이 팔을 엑스자로 교차하며 말했다. 인파 속에서는 폐가 움직이기 어려우니 숨을 쉴 수 있도록 가슴에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배웠단다. 제일 좋은 건 양손으로 반대쪽 팔꿈치를 잡는 법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비몽사몽하며 이야기를 듣던 중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구나"라며 공감해주기도 전에 다짜고짜 "언제 배웠어?"라고 물었다. "오늘. 안전 시간에." 이태원 압사 참사가 일어난 지 사흘째 되던 지난 1일 밤의 일이었다.

이태원 참사를 알리지 못한 이유

뼈와 살이 다 여물지 않은 어린이들이 압사사고 예방 자세를 해야만 하는 상황은 상상조차하기 싫었다. 배운 대처 요령을 전하는 딸도 살짝 두려워하는 기색이어서 '걱정 마. 조심하면 돼'라고 달래줬다. 수많은 언니오빠들이 길을 걷다가 돌아오지 못한 최근의 일은 차마 자세히 전할 수 없었다.
 
 지난 10월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앞에 마련된 이태원 압사 참사 희생자 추모공간에서 내외국인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 권우성
 
   
지난 1학기, 딸은 학교에서 안전 교육을 받으면 한동안 "무섭다"는 말을 반복했다. 지진 날까봐 무서워, 불 날까봐 무서워, 전쟁 날까봐 무서워, 하며 울먹였다. 급기야 언제든 대피할 수 있도록 자기 전마다 비상보따리를 싸기도 했다. 

심리상담센터 선생님은 '이 시기 아동들이 발달 과정에서 범불안을 겪기도 한다'며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재난이나 사고가 자기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가정하는 능력이 생기면서 겪는 긴장이니 대비책을 알려주며 안심시키면 된다는 솔루션을 받았다. 

그날부터 딸이 무섭다고 호소할 때마다 아는 정보를 총동원해 알려줬다. 우리나라는 아직 휴전 중이지만 군인들이 너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어 일본보다는 지진이 덜 일어나지만 만일 벌어진다 해도 대피할 곳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부모의 확신에 찬 이야기를 들으면 비교적 편안히 잠이 드는 듯했다.

딸이 학교에서 화재 교육을 받고 온 날 밤이었다. 어김없이 속사포 랩처럼 '불 날까봐 무섭다'고 읊조리는 중이었다. 나는 침실 천장에 달린 화재감지기, 엘리베이터 앞 소화전 등을 근거로 '우리는 언제나 대비할 준비가 돼 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무엇보다 평소에 불이 안 나도록 조심하면 된다고 쐐기를 박았는데, 예상치 못한 질문이 돌아왔다.

"다른 집들도 조심해? 동네에 어린이들이 많이 사는 걸 알고 다른 어른들도 다 불 안 나게 조심해?"
 
신뢰의 연결고리가 끊긴 날

딸은 한 사람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사고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안전은 2인3각과도 같아서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어긋나면 무너질 수 있다. 개인이 스스로 조심하고, 집·학교·일터마다 예방법을 준수하며, 중앙·지방정부가 시스템으로 만일에 대비하는 3박자가 호흡을 맞춰야 사회가 무탈하게 나아간다.

여기엔 중요한 전제가 있다. 나뿐만 아니라 옆집도 가스 밸브를 잘 잠그고 전자제품을 안전하게 쓸 것이라는, 혹여나 화재 위험이 생겨도 119에 전화하면 곧바로 소방이 출동할 것이라는 신뢰다. 이 땅에 사는 모두가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학생들은 학교에 가고, 노동자들은 일터로 향하고, 국민은 국가에 한 표를 주고 세금을 낸다.

이태원 압사 참사는 신뢰의 연결고리가 끊긴 사건이다. 정확히 말하면 다수의 시민은 당시 저마다의 책무를 성실히 지켰다. 사람들이 뒤섞여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 속에서 침착하게 통행을 안내한 여성, 위험 징후를 반복적으로 알린 112 신고전화들은 이 사회가 안전하다는 믿음을 깨지 않으려 애쓴 증거들이다.

반면 국가는 신뢰를 저버렸다. 경찰청이 1일 공개한 112 신고 녹취록을 보면, 참사가 발생하기 3시간여 전부터 "불안하다". "압사당할 것 같다", "통제 좀 해달라"는 구조 요청이 11건이나 접수됐는데도 현장 출동은 4건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일방통행 같은 적극적인 대응 없이 자체 종결 처리했다. 국가가 약속한 책임을 지키지 않은 순간 안전은 무너졌고, 서울 한복판에서 156명(1일 오후 11시 기준)의 무고한 국민이 한순간에 삶의 기회를 빼앗겼다.

다시 화재 교육을 받은 날 밤으로 돌아가면, 딸의 기습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응. 모두 조심하려고 노력해. 그렇지 않은 누군가를 보면 사람들이 요구해. 조심하라고."

8년 전 세월호 참사로 사회의 믿음이 처참히 붕괴됐을 때, 많은 국민이 국가에 '왜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냐'고 끈질기게 물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월 30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압사사고 현장을 찾아 소방과 경찰의 설명을 들으며 살펴보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정치색을 덧씌우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목숨 걸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안전사회 건설을 외친 세월호 가족들이 있었기에 이 공동체의 신뢰는 조금씩 회복하는 중이다. 지자체와 교육청들이 초등학생에게 생존수영을 가르치고 <안전한 생활>이라는 교과목을 개설해 딸이 학교에서 안전할 권리를 배우는 걸 보면 말이다. 이 나라 공교육을 믿어도 되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 요소 중 하나다.

지금 이태원 압사 참사 후 '무고한 희생의 원인을 밝혀라', '책임 소재를 분명히 짚어라' 등의 분노도 결국은 공동체의 신뢰를 복구하라는 뜻일 것이다. 단지 경찰 공무원 몇몇을 벌주는 결과로 끝내선 안 된다.

딸에게 '모두 조심하니 걱정 마'라고 확언할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 속에서 편안하게 길을 걷고 지하철을 타고 외출해도 된다는 믿음이 돌아오도록 정부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날 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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