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신발끈 묶어 보냈던 아들, 주검으로 돌아왔네…"한덕수 손자가 전화해도 안갔을까"

김하나 2022. 11. 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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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 2시 7분께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 1층.

A씨는 "경찰이 무시했다. 내 아들이 대통령 아들이 아니어서. 첫번째 신고했을 때 수백명이 왔어야지. 한덕수 국무총리 손자가 전화했으면 안갔을까. 나쁜 사람들. 니들 아들이 그렇게 전화했으면 몇 백명 (경찰) 데려 갔을 거 잖아. 내가 일반인이라 안 간거지"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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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과 눈물의 유실물센터…신발 한짝 양손에 꼭 감싼 엄마 "우리 예쁜 아들 옷이 안 보여" 오열
흙자국 선명한 옷가지, 처참하게 짓밟힌 롱부츠, 한국어가 씌여진 일본어 노트
유족들, 참사 당일 경찰 늑장 대처에 극노 "내 아들이 대통령 아들 아니어서 경찰이 무시했다"
생존자들 "난 운 좋게 살았지만 돌아가신 분들만 생각하면 안타까워"
1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유실문센터에는 희생자들의 유실물이 보관되어 있다. ⓒ데일리안 김민호 기자

2일 오후 2시 7분께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 1층. 중년 여성 A씨는 신발을 하나하나 뜯어보더니 검정 신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이고 내새끼. ㅇㅇ아"라고 울음을 터트렸다. 신발 한짝을 양손으로 꼭 감싸쥔 A씨는 "아침에 우리 예쁜 아들 '엄마 신발이 자꾸 벗겨져' 그래서 내가 끈을 묶어 보냈어"라며 목놓아 울었다. 이어 "우리 불쌍한 아들 옷 찾아가야지. 우리 예쁜 아들 옷이 안 보여"라며 비틀대며 옷을 찾기 시작했다.


이틀째 운영 중인 유실물센터는 그날의 아픔과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핼러윈을 앞두고 한껏 뽐내었을 망자의 옷가지는 아직도 선명한 흙자국을 품은 채 돌아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이 30㎝가 넘는 롱부츠는 누군가에게 처참히 짓밟힌 채 센터 한쪽 구석을 무심하게 지켰다. '오늘' '회사'라는 한국어가 씌여진 일본어 노트는 여전히 여백이 많이 남았건만 누가 더 써줄 지 기약이 없었다. 체육관 곳곳을 메운 각양각색의 운동화들은 이미 들어설 때부터 눈물 범벅이 된 유족들에겐 다 똑같은 신발로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유실물센터에는 이날 오후 12시 기준 가방 126개와 옷 265벌, 양쪽 다 온전히 수거된 신발 372켤레, 한 짝만 남은 신발 66짝, 전자제품 등 기타 물품 243개 등 총 1006개의 유실물들이 저 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보관돼 있었다.


1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유실문센터에는 희생자들의 유실물이 보관되어 있다. ⓒ데일리안 김민호 기자

유실물센터의 유족들은 경찰의 늑장 대처에 극노했다. A씨는 "경찰이 무시했다. 내 아들이 대통령 아들이 아니어서. 첫번째 신고했을 때 수백명이 왔어야지. 한덕수 국무총리 손자가 전화했으면 안갔을까. 나쁜 사람들. 니들 아들이 그렇게 전화했으면 몇 백명 (경찰) 데려 갔을 거 잖아. 내가 일반인이라 안 간거지"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여동생을 잃은 B씨는 "경찰이 통제를 잘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인데, 너무 안일하게 대응한 것 같다"고 원망했다.


현장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한 김달현(28)씨는 "아내와 함께 10시 20분께 이태원 골목에 들어가자마자 사람들한테 밀려서 완전히 끼었다"며 "처음에는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나' 마냥 신기했다. 무섭다는 느낌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딱 시작되니 힘 싸움이 장난식으로 이뤄졌던 것 같다. '우리가 먼저 밀어' '먼저 가자' 이런 소리를 많이 들었다. 밀리다가 갑자기 넘어지기 시작하면서 쓸려내려갔다"고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김씨는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떠 있었다.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숨 쉬기 많이 어려웠다"며 "어머니께 전화 한 통 했었는데 그때 '못 살 것 같다. 이제 죽을 것 같다. 가족들 깨워 신고 좀 해달라'라는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놓쳐 더 이상의 통화는 힘들었다. 기절은 안했다. 당시 아내는 자꾸 눈을 감더라. 그래서 눈 감으면 안 된다 눈 감으면. 호흡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 무조건 숨 쉬는 데만 집중해라, 이런 얘기를 쉬지 않고 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지난달 29일 오후 10시 30분부터 30분 동안 인파에 갇혀 있었다는 최모(39)씨가 다리를 절뚝이며 홀로 분실한 가방을 찾으러 왔다. 최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앞에 다 죽어 있었다"며 "저도 깔려 있는 상태였어서 (경찰 신고는 못했다) 곳곳에서 '살려달라'는 말과 비명 소리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운 좋게 살았지만 유가족들, 돌아가신 분들만 생각하면 안타깝다. 마음이 아프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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