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옆 한인 있었다면? 북미회담 결렬서 시작한 이 영화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당시, 트럼프 곁에 한인 정치인이 단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5명의 재미한인이 2020년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초선’(Chosen)은 이런 물음에서부터 출발한 작품이다. 재미한인인 변호사 출신 감독 전후석(38)은 전작 ‘헤로니모’(2019)에서 쿠바 한인 이민사를 다룬 데 이어 두 번째 작품에서도 재외동포를 카메라에 담았다. 세대도, 출신도, 이념 지향도 제각각인 다섯 후보의 미국 정계 도전기를 통해 재미한인 사회의 굴곡진 과거와 현존하는 갈등 구조를 생생하게 펼쳐낸다.
“한인 정치인 있었다면?” 가설에서 재미한인 정체성 탐구로
국내 극장 개봉을 하루 앞둔 2일 서울 여의도동에서 만난 전 감독은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의 회고록(『그 일이 일어난 방』)을 읽었던 순간을 다큐를 처음 구상한 계기로 꼽았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미국 정치인 몇 명의 손아귀에 따라 결렬되는 걸 보면서 ‘미국 정치에 재미한인들이 많아지면, 한반도에 보다 우호적인 정책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세우게 됐어요. 그런데 막상 촬영을 하다 보니 제가 평소 갖고 있었던 재미한인으로서의 정체성 관련 질문을 포괄적으로 담는 쪽으로 점점 확장됐죠.”
그의 말대로 영화는 단순히 이들 후보들의 선거 과정만 쫓는 대신, 각자 미국에 둥지를 틀게 된 과정부터 그 경험이 현재의 정치 성향에 미친 영향까지 훑는다. 예컨대 목사 아버지를 뒀지만, 동성애자인 데이비드 김은 부모님과 불화할 뿐 아니라 보수 기독교 가치가 주류인 재미한인 사회에 융화되지 못해 선거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가 하면 주한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메릴린 스트릭랜드, 평범한 주부로 살다 LA폭동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한 미셸 박 스틸 등, 각 후보의 개인사와 현시점의 치열한 선거 현장이 교차된다.
전 감독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뒤섞은 이유에 대해 “모든 사람이 제각기 다른 성향·연령대·이념을 갖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가 연대할 수밖에 없는 어떤 공통분모를 찾고 싶었다”며 “그중 하나가 개개인의 이민 여정 역사였다. 시작은 모두 미미했지만 성장하는 과정의 여러 아메리칸 드림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재미한인들의 공통분모로 뽑아낸 주요 사건은 1992년 LA폭동(4·29사태)이다. LA폭동이라는 집단적 충격을 거치며 미국 내 한인들이 자신들을 대변할 정치인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전 감독은 “LA폭동 당시에는 선출된 한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수에 해당하는 민족이 직면하게 된 현실을 부각하고 싶었다”며 “한편 30년 전에 LA폭동이 있었다면, 요즘 세대는 아시안 혐오 범죄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아 이를 포함해 각 세대가 직면한 공동체적 트라우마를 담았다”고 덧붙였다.
“한인 성공 자축하는 영화 아냐…내부 갈등 드러내야”
영화는 이처럼 후보들 간 공통분모를 부각하면서도, 이들 간의 갈등 구조도 애써 숨기지 않는다. 특히 영화가 사실상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데이비드 김은 결과적으로 유일하게 낙선한 후보지만, 한인사회의 여러 갈등을 상징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게 됐다. 전 감독은 “데이비드 김은 재미한인 사회에 존재하는 세대 갈등,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 그의 교제 상대와 연관된 인종 문제까지, 각종 갈등의 선봉에 서있었다”며 “재미한인들 간 정치 성향 차이는 대부분의 이민 사회가 직면하는 1·2세대 간 갈등이기도 한 동시에, 교회 중심으로 형성된 한인사회의 보수 기독교적 성향과도 직결된다”고 분석했다.
‘반(反) 공산주의’를 외치는 보수와 보편적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진보, 이민 정책을 두고 정반대 주장을 펴는 양 진영의 모습 등 같은 재미한인들 사이에도 갈리는 가치관을 가감 없이 담아낸 전 감독은 “‘초선’을 한인들의 성공을 자축하는 영화로 그리기 싫었다”고 했다. “밖으로 우리 권리를 위해 싸우는 행위만 존재하고,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이겨도 절반의 승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모든 디아스포라는 소수자…공존 자세 내재화”
그러면서도 그는 ‘초선’과 같은 디아스포라(이주민) 콘텐트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 “공존을 가능케 하는 도덕적, 정신적 기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모든 디아스포라는 소수자들이잖아요.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거나 존재의 정당성을 의심받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다양한 사람들을 맞닥뜨렸을 때 공존하려는 기본적인 자세가 내재화돼있죠. 이런 이웃에 대한 환대, 다양성에 대한 포용을 지닌 디아스포라 스토리가 한국에서도 어떤 경종을 일으켰으면 좋겠어요. 사실 과연 우리나라가 난민·다문화·탈북자 등과 공존할 준비가 돼 있는지 의문이거든요.”
디아스포라 담론에 천착해온 그가 다음 작품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이야기 역시 재미한인 관련이다. “최근에 북한에서 13년 동안 활동한 재미한인 물리치료사를 만났어요. 그분이 장애 아이들을 치료하는데, 8주간의 재활 훈련을 할 때마다 장애 아이들과 부모님 간의 관계 회복을 늘 목격하신대요. 그 관계 회복 속에서 자신은 한반도의 회복을 동시에 본다는 말을 듣고 감동받았어요. 그분이 만난 장애아동과 그들 가족을 촬영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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