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에도 미사일 도발…선넘은 北, 핵카드 흔들었다
북한이 2일 단거리탄도미사일(SRBM)을 포함한 각종 미사일을 동·서해 상으로 발사했다. 특히 SRBM 1발은 북방한계선(NLL) 남쪽에 떨어졌다. NLL 이남에 북한 미사일이 떨어진 건 분단 이후 처음 벌어진 중대 도발이다.
특히 이날 도발은 북한군 서열 1위인 박정천 노동당 비서의 담화가 나온 직후에 자행됐다. 외교가에선 "김씨 일가를 지칭하는 '백두혈통'을 제외한 북한군 최고위층 인사의 담화는 사실상 김정은의 직접 위협에 준하는 상황"이란 해석이 나온다.
핵카드 꺼내 흔드는 北
박정천은 이날 0시경 공개된 담화에서 "미국과 남조선이 겁기 없이 우리에 대한 무력 사용을 기도한다면 공화국 무력의 특수한 수단들은 부과된 자기의 전략적 사명을 지체 없이 실행할 것"이라며 "미국과 남조선은 가공할 사건에 직면하고 사상 가장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정천이 언급한 '특수한 수단'과 '가공할 사건'은 사실상 핵도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9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핵무력 정책 법령을 채택하며 "핵무력의 사명"을 언급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특히 이날 담화를 발표한 박정천은 북한 권력의 핵심인 당 정치국 상무위원 6명 중에서 한 명이다. 당국은 그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도 맡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북한에서 '김씨 일가'를 제외하고 군 관련 인사가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으로, 북한의 도발 시간표가 사실상 김정은의 직접 위협 '목전'까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은 '목전'까지 온 핵위협
실제로 박정천의 실명 담화 전후엔 대남·대미 사업 총책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담화가 나왔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전인 지난 4월 북한은 "유사시 대북 선제타격 가능성"을 언급한 서욱 당시 국방장관의 발언이 나왔을 때도 박정천 비서의 담화(4월 3일)를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와 함께 공개했다. 그리고 "핵보유국을 상대로 선제타격을 함부로 운운하며 망솔한 객기를 부렸다"는 내용의 김 부부장의 담화가 이틀 뒤 이어졌다. 당시 김여정의 담화는 남측에 대한 핵공격 위협의 시발점이 됐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박정천의 담화는 사실상 김정은 위원장의 경고로 봐야한다"며 "특히 지난달 총참모부 대변인 발표와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 이어 나온 이번까지 경고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내부적으로 대형도발의 수순을 밟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도 "북한이 과거에는 탄도미사일 발사나 포사격 위주로 대응했는데, 이제는 핵카드 꺼내 흔들면서 핵공격 위협을 가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대미·대남 핵공격 위협이 더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새벽 미국 시간대에 맞춘 담화
전문가들은 이번 담화가 나온 시간대에도 주목한다. 북한은 이번 담화를 이례적으로 2일 0시경에 발표했다. 미국 워싱턴 기준으로는 오전 11시로, 명확히 미국을 겨냥한 담화란 분석이 나온다.
실제 박정천의 담화는 미 국방부가 지난주에 내놓은 핵태세검토보고서(NPR)의 내용에 대한 비난으로 채워져 있다. 박 비서는 "미 국방성은 우리 공화국의 '정권 종말'을 핵전략의 주요 목표로 정책화했다"며 "(남측) 국방부 장관과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비롯한 군부 호전광들도 우리가 핵을 사용하는 경우 정권을 전멸시켜야 한다는 헷뜬(허튼) 망발을 늘어놓았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이 '정권종말'을 언급한 것을 북한의 '최고 존엄'인 김정은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이고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는 "중대 도발의 명분 쌓기에 나선 북한은 이번 담화에 이어 조만간 김여정이 직접 나선 공개 비난 성명 등 '말폭탄'을 쏟아낼 가능성이 크다"며 "특히 아직 조 바이든 대통령이나 미국 당국자에 대해서는 실명 비난을 자제하고 있는 북한이 실질 협상 대상이 될 미국에 대한 발언 수위를 어떻게 가져갈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에도 남측 겨냥했다
북한의 이번 도발이 '이태원 참사'에 따른 한국의 국가 애도 기간에 나왔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전문가들은 당초 이태원 참사 상황을 고려해 북한이 NLL 침범 등 고강도 도발에는 신중할 거란 관측을 내놨다. 그러나 북한은 이런 예상을 깼다. 그동안 한국의 여론을 의식해 최소한의 '선'을 넘지 않았던 도발 패턴이 깨졌다는 의미다.
특히 북한이 이날 오전 8시 51분경 동해상으로 발사한 SLBM 3발 가운데 1발은 동해 NLL을 넘어 속초 동쪽 57㎞ 공해상에 떨어졌다. 분단 이후 처음 NLL 이남을 향해 발사된 북한의 미사일 때문에 울릉군에는 한때 공습경보까지 발령됐다.
북한이 최근 들어 지속적으로 한·미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행동을 반복하면서 사실상 예견돼 있는 7차 핵실험 등 중대 도발 시점의 예측도 어려워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 최근 북한은 과거와 달리 한·미 연합훈련을 진행하거나 핵추진 항공모함 등 미국의 전략자산이 한반도에 전개한 상황에서도 서슴없이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평소라면 북한이 이태원 참사와 같은 대남 상황을 살펴보면서 여론을 고려해 자제할 법한데도 그러질 않았다"며 "지속적인 긴장 조성을 통한 담판용 핵능력 확보라는 목표 완수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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