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휴게소에 '기생'하는 가족…이들에게 손 내밀겠습니까
“지갑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2만원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집 도착하자마자 바로 계좌이체 해드리겠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낯선 남자가 다가와 이런 말을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의심스러워 거절할 수도, ‘설마 사기를 칠까’ 하는 생각에 흔쾌히 돈을 내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관객을 ‘나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고민에 빠지게 하는 영화 ‘고속도로 가족’(2일 개봉)은 고속도로 이용객들에게 이런 대사를 매일같이 읊으며 살아가는 기우(정일우)네 가족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짐작 가듯 ‘2만원만 빌려 달라’는 기우의 말은 얄팍한 사기에 불과하다. 허나 그렇게 얻어낸 돈으로 만삭의 아내 지숙(김슬기)과 큰딸 은이(서이수), 막내아들 택(박다온)이까지, 네 식구가 휴게소 음식을 사서 나눠먹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들의 ‘사기’가 그렇게 큰 잘못일까,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이 가족은 휴게소 한쪽에 텐트를 치고 노숙을 하고, 단속에 걸리면 다음 휴게소까지 수십 km를 걸어가 똑같은 '사기'를 반복하는 곤궁한 삶을 살면서도, 테이프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휘영청 뜬 달빛을 벗 삼아 춤추는 소박한 행복을 놓치지 않는다.
나름의 질서가 잡혀있던 이들의 유랑은 영선(라미란)을 마주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들에게 7만원의 '거금'을 건네는 호의를 베풀었던 영선은 다른 휴게소에서 기우가 같은 수법으로 다른 사람들의 돈을 얻어내는 걸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기우가 구치소에 갇힌 뒤 방치된 나머지 가족들을 영선은 자신과 남편이 운영하는 중고 가구점으로 거둬들이고, 그렇게 두 가족의 위태로운 동거가 시작된다.
“세상살이 걱정에서 출발…온기 얘기하고파”
‘죽여주는 여자’(2016), ‘어른들은 몰라요’(2021) 등 현실적인 문제를 다룬 영화에 조감독으로 참여한 이상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고속도로 가족’은 한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지 않은 노숙인 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람들 간 온기가 지닌 힘을 보여주고자 한다. “세상살이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막연한 감정에서부터 이 영화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는 이 감독은 부유한 나라들에도 존재하는 홈리스를 보며 사회에서 밀려난 ‘고속도로 가족’이라는 소재를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여기에 실제 중고 가구점을 운영하는 장인·장모를 모델 삼아, 버려진 가구들을 갈고닦아 새로운 쓰임새를 만들어주는 영선과 도환(백현진) 부부 캐릭터를 만들었다. 겉으론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남모를 아픔을 간직한 영선네 가족과, 겉으론 한없이 불안정하지만 사랑으로 똘똘 뭉친 기우네 가족이 만나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는 모습은 진정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곱씹게 만든다. “그래도 사람 사이의 온기,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지가 빚어낸 섬세한 작품에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부문) 당시 프리미어에서 관객들의 호평이 쏟아졌다.
라미란부터 정일우까지…기존 이미지 탈피한 배우들의 열연
특히 관객들의 호평을 이끌어낸 지점은 각자 갖고 있던 이미지를 완전히 뒤엎은 배우들의 호연이다. 드라마에서 각인된 ‘치타 여사’ 캐릭터부터 영화 ‘정직한 후보’ ‘걸캅스’까지 코믹 연기를 이어온 라미란은 웃음기를 싹 걷어내고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영선을 연기했다. 겉으로 감정을 터뜨리지 않는데도 언뜻 내비치는 표정과 몸짓에서 한스러운 세월이 느껴진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선한 꽃미남 이미지가 강했던 정일우는 그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파격적인 변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걸 내려놓은 노숙자 연기를 선보였다. 아내와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장의 모습부터 과거 경험한 실패로 생긴 정신질환으로 폭주하는 모습까지, 영화 내내 긴장감을 불어넣는 건 그의 몫이다.
기우를 표현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만나기도 했다는 정일우는 지난달 28일 인터뷰에서 “기우가 언뜻 빌런(악인)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다”며 “기우는 친한 사람에게 배신 당하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것이지, 자의적으로 이런 삶을 택하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기우의 입장을 어떤 감정선으로 표현할지 많이 고민하며 준비했다”고 말했다.
유쾌한 캐릭터를 주로 맡았던 김슬기도 말수는 적지만 기우와 아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고단한 삶을 버텨내는 지숙을 매끄럽게 표현해냈다. 백현진 역시 특유의 생활 연기로 겉으론 툭툭거리지만 내면에 상처를 간직한 중년 남성을 스크린에 올려놨다. 3~4개월의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된 아역 배우들 서이수·박다온이 보여주는, 투명해서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연기도 영화의 빛나는 매력 중 하나다.
“당신이라면 이 가족을 안아줄 수 있는가”
영화는 마지막으로 갈수록 마음이 아리는 비극으로 치닫지만, 그런 전개에도 어느 한쪽이 완전히 선하거나 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이다. 당연히 어떤 인물의 행동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판단도 섣불리 내리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시작이 그러했듯, 관객 개개인에게 ‘당신이라면 이 가족을 안아줄 수 있는가’라고 넌지시 물어볼 뿐이다. 이 감독은 지난달 말 언론시사회에서 “결말을 보고 바로 이 질문을 같이 생각해보는 작품이 됐으면 했다”며 “영화가 어렵지 않게 관객에게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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