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53>] 술은 주적이다

데스크 2022. 11. 2.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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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53화 술은 주적이다


“우선 인터뷰에 응해 주신 김 선생님께 감사드리고요. 혹시 거슬리는 질문이 있으면 답변을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역전의 용사라는 책을 주목하게 된 것은 주인공 주경 때문인데요. 물론 책에서도 언급됩니다만 수주 변영로의 ‘백주에 소를 타고’ 같은 수필은 주당의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벌일 수 있는 퍼포먼스죠. 하지만 저는, 편집망상의 결과이긴 합니다만 술이란 적을 섬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경의 모습에서 블랙코미디랄까 여하튼 진한 페이소스를 느꼈거든요.”


장 기자가 미처 말을 끝내지 않았는데 문득 김석규가 눈을 부릅떴다.


“술을 주적으로 상정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적을 섬멸하듯 술과의 전쟁을 치른 건 꼭 편집망상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그걸 편집망상으로만 몰고 가버리면 그냥 코미디에 불과하잖아요. 아마 기자님이 주목한 건 코미디적인 요소에 있겠지만 사실 거기엔 술꾼의 진심이 담겨있어요.”


김석규가 둘의 얼굴을 차례로 일별하고 말을 이었다.


“편집망상에 들기 전부터 술을 적으로 가정해서 전투를 벌인다든지 하는 농담은 이미 했었어요. 그런 류의 농담 많잖아요? 술은 인간에게 해로운 것이니 몽땅 마셔서 없애버려야 한다고요. 처음엔 장난스럽게 술자리 농담으로 시작한 말이 차츰 진담으로 변해가는 거예요. 술이 정말 국가와 사회를 좀 먹는 악이란 생각이 드는데….”


“잠깐만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죠?”


“음주와 폭음으로 인한 부작용들 때문이죠. 내 몸도 몸이지만 특히 집사람의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거든요. 가정이 병들면 국가나 사횐들 온전하겠어요? 수주가 백주에 소를 타고 퍼포먼스를 벌일 정도면 집에선 어떻겠어요. 아니 그 부인은 어떠하겠어요. 미칠 노릇이겠죠?”


“그래요. 일설에 의하면 수주는 머리가 깨져 맨날 붕대를 싸매고 있었다느니 사흘거리로 이불에 실례를 해서 동네 망신을 시킨다느니 그런 소문도 있었죠.”

장 기자가 말을 이어받았다.


“가정이 모여 사회가 이뤄지고, 그 사회가 국가를 형성하는 거니까 결국은 술이 국가와 사회의 주적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게 바로 20년 동안 형사 생활하면서 접했던 강력사건들 때문이죠. 대부분 술 때문에 사건사고가 일어났으니까요.”


“그럼 술을 끊어버리면 되잖아요.”


“그렇죠. 술을 끊어버리면 되죠.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가요? 술을 끊어야 하는데 끊지 못하니까 술이 주적이라는 엉뚱한 소리 해가면서 마셔댄 거죠. 거 왜, 정치권에서 잘 쓰는 논점 흐리기 있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예요, 술꾼에겐. 그러니까 알코올중독은 점점 깊어가는 거고요.”


“책에서 주치의는 ‘아마 술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뇌에 자극을 가해 술을 보복대상이나 원수로 상정하게 된 것 같다’고 하는데요?”


장 기자가 역전의 용사를 뒤적이다가 되물었다.


“당연히 술에 대해서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죠. 술 때문에 몸 망가지고 가정 엉망 되고 했는데 그럼 좋은 기억이겠어요? 하지만 술을 끊지 못하다보니까 마실 핑계를 찾은 거고, 그게 말도 되지 않는 주적 타령이고, 그나마 편집망상이 되기 전엔 술 마실 농담으로 해대던 게 편집망상이 되고서는 진짜로 술을 적군 대하듯 한 거죠.”


“지금은 술을 끊었다고 보면 되나요. 술 생각나지 않고요?”


“편집망상 벗어나서 알코올중독 치료한지가 4개월이 조금 지났는데 아직 불안해요. 그렇게 술 생각나는 건 아닌데 혹시 또 모르니까요.”


“조금 있으면 송년회다 뭐다 하면서 매일같이 술자리에 불려 다니는 사람들 많을 텐데요. 그 분들께 한 말씀 하신다면요.”


“그분들껜 할 말이 없어요. 어차피 제가 조언한다고 새겨들을 사람들도 아닐 테고요.”


“하긴 술꾼들이 누구 말 들으면서 술 마시냐?”


김석규의 말을 받아 이철백이 맞장구를 쳐주었고, 세 사람은 방안이 떠나가도록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데 석규 너, 어떻게 인터뷰할 마음을 먹게 됐냐?”


이철백이 분위기가 한결 나아진 틈을 타 질문을 던졌다. 김석규가 얼굴 가득 번진 웃음기를 지우고 장 기자와 이철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는 사실 역전의 용사라는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수주의 명정 40년처럼 술에 대한 추억담 같아 보였거든요. 그래서 처음엔 인터뷰를 거절하려 했죠. 그런데 주취자의 범행에 희생된 피해자의 가족, 그리고 정신병원에 함께 입원하고 있던 환자들의 가족 때문에 마음을 바꾸게 된 거예요. 지금 이 순간에도 주취자의 범행 또는 알코올중독자의 존재에 의해 가정이 풍비박산 나고 있거든요. 그 가족은 현실에서 지옥을 체험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고요. 그들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대안을 제시하고 싶어서죠. 물론 기사화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말씀해 보세요. 최대한 반영되도록 노력할께요.”


장 기자가 다짐하듯 어금니를 굳게 깨물었다. 김석규는 주취자 변동원에게 가족을 잃고 천애고아가 된 신예지의 안타까운 사연을 먼저 들려주고 나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알코올중독자 조무락을, 아니 그의 가족을 뇌리에 떠올렸다. 조무락의 가족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다른 환자들은 가족이 방치하다시피해서 면회라곤 가물에 콩 나듯 하는데 조무락은 특이하게도 하루가 멀다 하고 가족이 찾아와 면회를 했기 때문이었다.


김석규의 맞은 편 침상에서 입원생활을 한 조무락은 험상궂은 인상에 무뚝뚝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알코올중독 환자들 대다수가 술 마시지 않으면 순한 양이듯 조무락도 인상과 달리 무척 온순했다. 어쩌면 알코올중독자들은 평소 순한 양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심한 피해와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그걸 이겨내거나 피하기 위해 지나친 음주를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더욱이 조무락은 평생 막노동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던지라 일상이 술이었는데 힘든 육체노동에 술이 빠질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조무락은 낮엔 힘들고 고통스런 노동을 이겨내기 위해 술을 마셨고 어스름이 지면 막노동으로 고단해진 심신을 달래기 위해 또 술을 마셨다.


조무락은 남들 보기에 하찮다싶은 막노동을 하고 있었지만 천성이 워낙 부지런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처자식을 부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을 위해서 쓰는 돈이라곤 고작 술값뿐이었고 그나마도 막소주를 마시다 보니 돈 들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조무락은 비록 넉넉하진 않았지만 두 딸을 명문대학까지 진학시켰다. 그래서 조무락은 막소주를 마시면서도 딸자식들에 대한 자부심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데 돈을 아낀다며 변변한 안주도 없이 마신 술이 결국 조무락을 알코올중독자로 만들고 말았다. 조무락은 식사와 새참 때만 반주 삼아 마시던 술을 언제부턴가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나면 홀짝거리게 되었다. 전에는 고된 노동을 이기기 위해 술을 마셨는데 이제 노동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음주가 우선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실수가 잇따르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십장은 이제껏 봐온 정리를 한번쯤 생각해 볼 수도 있었지만 결코 그러지 않았다. 조무락은 인정사정없이 현장에서 헌신짝처럼 쫓겨났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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