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어른들, 살아서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이승숙 2022. 11. 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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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 고향서 온 감들,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들과 만나 나누면서 든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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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숙 기자]

며칠 전에 고향 인근에 사는 친정언니가 감을 4박스나 보내주었다. 이렇게 여러 박스 보낸 것은 이웃과 나눠 먹으라는 뜻이리라. 감 잘 받았다며 형부에게 전화를 했더니 "처제, 감 따느라 바빠서 이제야 보냈어요. 혹시 더 필요하면 말만 하소. 또 보내줄 테니까"했다. 형부는 늘 넉넉하게 우리를 챙겨 주시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고향은 '씨 없는 감'으로 유명한 경북 청도군이다. 경북 청도는 가을이면 온 동네가 온통 주황빛으로 물든다. 집집마다 울타리 안에 감나무가 몇 그루씩은 다 있고 감 밭이 있는 집도 많다. 그러니 청도 사람들은 10월만 되면 감 따느라 세수하고 거울 쳐다볼 새도 없이 바쁘다. 감 농사를 많이 짓는 형부와 언니도 하루 종일 하늘 한 번 쳐다볼 새 없이 바빴다고 했다. 

고향에서 온 감

언니가 보내준 감을 이웃에 사는 지인에게 주려고 연락했더니, 이웃주민인 그이가 그러는 거였다.

"그 감을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들께 드리면 어떨까요? 오늘 점심 때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들이 강화에 오신다고 하는데, 그 분들께 감을 드리면 어떨까요?"

지인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형부와 언니가 보내준 감이 좋은 곳에 잘 쓰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이미 먹은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니 감을 비전향 장기수 어른들께 드리자.' 지인과 그렇게 의견을 나누고 장기수 어르신들을 뵈러 가기로 했다.
 
 1일(화요일) 점심 때 비전향 장기수 어른들을 뵈러 갔다. 따뜻한 밥을 대접하고 함께 나누는 사람들.
ⓒ 이승숙
지난 1일(화요일) 점심 때 비전향 장기수 어른들을 뵈러 갔다. 인근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드실 거라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갔더니 식당 주인이 벌써 상을 다 차려놓고 어른들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전향 장기수'란 말은 듣기만 했지 그 분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신념을 꺾지 않고 지킨 분들이라는 생각에 조금 호기심이 동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호기심이었지 관심은 아니었다. 나는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 별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지인을 통해 인연이 맺어졌다.

현재 생존해 있는 비전향 장기수는 모두 아홉 분이라고 한다. 그중에 다섯 분이 오셨는데 모두 연세가 많으셨다. 아흔을 앞두고 있는 분도 있었지만 아흔을 넘긴 분이 더 많으셨다. 그 분들을 뵈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모두 아버지 연배의 분들이라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리라.

아버지 살아계셨다면... 아버지 연배의 나이 든 어른들

생전의 아버지는 노쇠해지시면서 청력이 떨어져서 보청기를 귀에 꼽고 계셨는데, 그 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잘 알아들으실 수 있도록 말을 천천히 또박또박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잘 들리지 않는지 우리 입 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들으시기도 했다.

보청기를 끼고 있는 그 분들을 보자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래서 얼굴을 가까이 하고 알아들으시기 쉽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눈을 맞추며 살갑게 대했더니 처음 보는 분들인데도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분 같은 그런 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연세들이 많으셔서 모두 보청기에 의지해서 대화를 나눕니다.
ⓒ 이승숙
과거 빨치산으로 불리거나 공작원이었던 분들이니 남측엔 한때 '적'이었던 분들이다. 언젠가는 소위 '빨갱이', '간첩'이라 불렸던 사람들이다. 옛날 같으면 그 분들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시대가 변했고 세상도 많이 바뀌었다.

그 분들을 뵈니 그저 내 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온갖 고생을 한 어른들이다. 일본이 강제점령하던 일제시대에 태어났고 전쟁을 겪었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죄로 오래 감옥살이를 한 분들이다. 그 조국이 우리와 다른 조국이라서 문제였지, 민족을 사랑한 것은 그 분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였으리라.

점심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옆에 계신 분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 여쭤 보았다. 여든여덟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1962년도에 공작원으로 내려왔는데 그때 아들이 한 살 조금 넘었다고 했다.

"아드님 이름이 어떻게 돼요?" 여쭤 봤더니 "동철이, 박동철이에요. 2월 18일이 생일인데, 1961년에 태어났어요." 했다.
 
 분단과 냉전의 모순을 온 몸으로 보여주신 분들.
ⓒ 이승숙
헤어질 때 갓 돌을 지냈다는 아들의 생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그 분을 보자 생전 아버지 생각도 나고, 마치 내가 양딸이라도 된 양 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아드님과 나이가 같은 저를 딸인 양 생각하시라고 하며 "선생님에게 손자도 있고 어쩌면 증손자도 있겠어요"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 순간 그 분의 눈길이 약간 흔들리는 것 같았다. 감정을 나타내지는 않으셨지만 분명 흔들리는 듯했다.

그립다는 말로도 다 못 담을 '그리움'

순간 그렇게 말을 한 걸 후회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손자며 증손자도 있으시겠다고 했지만, 그 분에게는 그 말이 결코 가볍게 들어 듣고 넘길 말이 아니었을 것 같다. 아들이 태어난 날이며 이름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데, 그 분이라고 왜 가족이 보고 싶지 않을까. 얼마나 그립고 그리우셨을까. 필설로는 다 담을 수 없을 그 분의 그 마음을 나는 가볍게 말했던 것이다.

결국 드리려고 가져갔던 감은 그냥 가져왔다. 연세가 아흔을 넘겨 이쪽저쪽인 노인들이 무거운 감 박스를 들고 가실 수는 없을 것 같아 택배로 보내드리기로 했다. 낙성대 '만남의 집'에 계시다며 서울 올 일 있으면 놀러오라고 하셨는데, 그곳으로 보내 드리기로 했다.

비전향 장기수들을 모시고 강화도 나들이를 했던 분들은 김포의 한 교회 봉사자들이었다. 1박2일 나들이였으니 준비와 진행에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연로하신 분들이시니 혹시라도 넘어지거나 다칠까 봐 조심스러워서 도로를 건널 때나 차에서 타고 내릴 때면 일일이 챙기고 돌봐드리는 게 보였다.  
 
 마주잡은 두 손.
ⓒ 이승숙
 
 반갑게 인사하는 이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승숙
점심을 드시고 어르신들은 차를 타고 떠나셨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살갑게 대하는 우리가 가깝게 여겨지셨는지 아쉬워하면서 떠나셨다. 우리는 떠나는 그 분들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해 드렸다. 

살아서 가족을 만나실 수 있기를

비전향 장기수 분들에게 감 홍시를 드리면 어떻겠냐는 지인의 제안을 받고 처음 든 생각은, 그들이 내 아버지와 같다는 마음이었다. 아버지 연배의 분들이시니 그런 마음이 들었다. 사상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은 잘 알지도 못하고 내게는 중요하지도 않다. 나는 오로지 나이 드신 어른, 아버지를 뵈러 간다는 마음으로 그 분들을 만났다.

내 아버지는 살아 계시지 않아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분들은 가족이 살아 있는데도 만나거나 보지 못한다. 오래 감옥을 살고 나왔지만 그 분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갇혀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분들은 언제나 되어야 보고 싶은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은데, 우리는 늘 뒤로 미루거나 아니면 아예 관심조차 없다. 그 분들에게 손자며 증손자를 만나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주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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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강화뉴스'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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