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어른들, 살아서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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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숙 기자]
며칠 전에 고향 인근에 사는 친정언니가 감을 4박스나 보내주었다. 이렇게 여러 박스 보낸 것은 이웃과 나눠 먹으라는 뜻이리라. 감 잘 받았다며 형부에게 전화를 했더니 "처제, 감 따느라 바빠서 이제야 보냈어요. 혹시 더 필요하면 말만 하소. 또 보내줄 테니까"했다. 형부는 늘 넉넉하게 우리를 챙겨 주시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고향은 '씨 없는 감'으로 유명한 경북 청도군이다. 경북 청도는 가을이면 온 동네가 온통 주황빛으로 물든다. 집집마다 울타리 안에 감나무가 몇 그루씩은 다 있고 감 밭이 있는 집도 많다. 그러니 청도 사람들은 10월만 되면 감 따느라 세수하고 거울 쳐다볼 새도 없이 바쁘다. 감 농사를 많이 짓는 형부와 언니도 하루 종일 하늘 한 번 쳐다볼 새 없이 바빴다고 했다.
고향에서 온 감
언니가 보내준 감을 이웃에 사는 지인에게 주려고 연락했더니, 이웃주민인 그이가 그러는 거였다.
"그 감을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들께 드리면 어떨까요? 오늘 점심 때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들이 강화에 오신다고 하는데, 그 분들께 감을 드리면 어떨까요?"
▲ 1일(화요일) 점심 때 비전향 장기수 어른들을 뵈러 갔다. 따뜻한 밥을 대접하고 함께 나누는 사람들. |
ⓒ 이승숙 |
'비전향 장기수'란 말은 듣기만 했지 그 분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신념을 꺾지 않고 지킨 분들이라는 생각에 조금 호기심이 동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호기심이었지 관심은 아니었다. 나는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 별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지인을 통해 인연이 맺어졌다.
현재 생존해 있는 비전향 장기수는 모두 아홉 분이라고 한다. 그중에 다섯 분이 오셨는데 모두 연세가 많으셨다. 아흔을 앞두고 있는 분도 있었지만 아흔을 넘긴 분이 더 많으셨다. 그 분들을 뵈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모두 아버지 연배의 분들이라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리라.
아버지 살아계셨다면... 아버지 연배의 나이 든 어른들
생전의 아버지는 노쇠해지시면서 청력이 떨어져서 보청기를 귀에 꼽고 계셨는데, 그 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잘 알아들으실 수 있도록 말을 천천히 또박또박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잘 들리지 않는지 우리 입 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들으시기도 했다.
▲ 연세들이 많으셔서 모두 보청기에 의지해서 대화를 나눕니다. |
ⓒ 이승숙 |
그 분들을 뵈니 그저 내 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온갖 고생을 한 어른들이다. 일본이 강제점령하던 일제시대에 태어났고 전쟁을 겪었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죄로 오래 감옥살이를 한 분들이다. 그 조국이 우리와 다른 조국이라서 문제였지, 민족을 사랑한 것은 그 분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였으리라.
점심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옆에 계신 분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 여쭤 보았다. 여든여덟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1962년도에 공작원으로 내려왔는데 그때 아들이 한 살 조금 넘었다고 했다.
▲ 분단과 냉전의 모순을 온 몸으로 보여주신 분들. |
ⓒ 이승숙 |
그립다는 말로도 다 못 담을 '그리움'
순간 그렇게 말을 한 걸 후회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손자며 증손자도 있으시겠다고 했지만, 그 분에게는 그 말이 결코 가볍게 들어 듣고 넘길 말이 아니었을 것 같다. 아들이 태어난 날이며 이름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데, 그 분이라고 왜 가족이 보고 싶지 않을까. 얼마나 그립고 그리우셨을까. 필설로는 다 담을 수 없을 그 분의 그 마음을 나는 가볍게 말했던 것이다.
결국 드리려고 가져갔던 감은 그냥 가져왔다. 연세가 아흔을 넘겨 이쪽저쪽인 노인들이 무거운 감 박스를 들고 가실 수는 없을 것 같아 택배로 보내드리기로 했다. 낙성대 '만남의 집'에 계시다며 서울 올 일 있으면 놀러오라고 하셨는데, 그곳으로 보내 드리기로 했다.
▲ 마주잡은 두 손. |
ⓒ 이승숙 |
▲ 반갑게 인사하는 이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이승숙 |
살아서 가족을 만나실 수 있기를
비전향 장기수 분들에게 감 홍시를 드리면 어떻겠냐는 지인의 제안을 받고 처음 든 생각은, 그들이 내 아버지와 같다는 마음이었다. 아버지 연배의 분들이시니 그런 마음이 들었다. 사상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은 잘 알지도 못하고 내게는 중요하지도 않다. 나는 오로지 나이 드신 어른, 아버지를 뵈러 간다는 마음으로 그 분들을 만났다.
내 아버지는 살아 계시지 않아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분들은 가족이 살아 있는데도 만나거나 보지 못한다. 오래 감옥을 살고 나왔지만 그 분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갇혀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분들은 언제나 되어야 보고 싶은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은데, 우리는 늘 뒤로 미루거나 아니면 아예 관심조차 없다. 그 분들에게 손자며 증손자를 만나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주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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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강화뉴스'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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